청송심씨 3세조 증문하시중청화부원군 휘 용(龍) 묘갈 우리 청송 심씨는 고려 말때부터 세상에 나타나니 문림랑위위시승을 지낸 휘 홍부(洪孚) 이분이 시조가 된다. 시승이 합문지후 휘 연(淵)을 낳고 지후가 공인 휘 용(龍)을 낳았는데 벼슬이 전리정랑에 이르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증문하시중청화부원군에 추봉이 되었으며 묘는 안성군 실왕리에 있다. 부인 김씨의 묘는 군의 서쪽인 침두리에 있어 공의 묘에서 五리쯤 떨어져 있다. 대수가 이미 멀고 묘에는 현각이 없기 때문에 공의 생졸과 행적, 부인의 계보나 관향 같은 것이 모두 인몰(湮沒)되어 전(傳)함이 없다. 우리 종족을 회고해 보면 시조로부터 三세인 공에게 와서 자손이 처음으로 번성하고 昌大해져서 대대로 명공(名公)과 석보(碩輔:賢臣)가 나와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다. 또한 두 번이나 왕비가 탄생되었으므로 억만년의 기초를 만들어 무강(無疆)한 아름다움이 있게 하였다. 아! 깊지도 아니하고 멀지도 아니하며 두텁지도 아니하고 무성하지도 아니한 것은 덕을 쌓고 어진 일을 행함에서 나온 것임을 여기서 징험할 수가 있다. 공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맏이는 좌시중청성백으로 시호가 정안공(定安公)인 휘 덕부(德符)이며 다음은 휘 원부(元符)이다. 정안공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는데 인봉(仁鳳)은 도총제요, 의구(義龜)는 판사요. 계년(継年)은 목사요, 징(澄)은 부윤이요, 온(溫)은 영의정 청천부원군으로 시호가 安孝이다. 이분이 성녀(聖女)를 낳아 소헌왕후가 됐다. 종(淙)은 청원위로 태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정(泟)은 동지총제가 되었다. 이로부터 내외의 많은 자손을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부윤(府尹)과 안효(安孝)의 두 집 자손이 가장 번성하니 관찰사 선(璿)과 좌참찬 광언(光彦)과 영의정 지원(之源)과 지사 지명(之溟)과 청평위 익현(益顯)은 부윤의 후손이요, 안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준(濬)은 영중추요, 회(澮)는 영의정 청송부원군으로 시호가 공숙(恭肅)이며 결(決)은 영중추로 시호가 정이(靖夷)다. 경기감사 대(岱)와 참판 연(演)은 모두 준(濬)의 후손이다. 대(岱)는 임진년 병란에 사절(死節)하였고, 공숙공의 손자인 사인 휘 순문(順門)은 직언을 하다가 연산주 때 화를 입었다. 아들 넷이 있는데 맏이는 영의정 연원(連源)이요, 그 아들 청릉부원군 강(鋼)은 곧 우리의 인순왕후의 친정 아버지가 된다. 그 때의 공의 묘우(廟宇)가 대(代)를 다하여 신주를 정성백 묘전에 묻게 되었는데 인순왕후께서 하교하기를 “꿈에 할아버지께서 원하시기를 신주를 묻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빨리 신주를 모시고 환궁하여 그 자손이 제사 지내게 하라.”하였으니 아! 공이 가신지 이미 백팔구십 년이 지났으나 그 영혼이 유통하여 감격시킴이 이와 같으니 기이하도다. 다음은 수찬 달원(達源)이요, 다음은 동돈녕 봉원(逢源)이요, 다음은 좌의정 통원(通源)이다. 그 뒤에도 대사헌 의겸(義謙)과 판서 충겸(忠謙)은 강(鋼)의 아들이다. 좌의정 희수(喜壽)는 봉원(逢源)의 손자요, 판서 액(詻)과 판서 집(諿)은 달원(達源)의 증손이다. 임진 정묘의 병란 뒤에 자손들이 공의 묘를 잃어버렸는데 충겸(忠謙)의 아들 영의정 열(悅)이 경기감사로 있을 때 찾았고, 희수(喜壽)의 증손 판중추 재(梓)와 집(諿)의 손자 부제학 유(攸)와 달원(達源)의 五대손 대사헌 단(檀)과 헌납 사홍(思泓)과 강(鋼)의 현손 참지 평(枰)과 액(詻)의 손자 감사 벌(橃)과 열(悅)의 손자 지평 권(權)과 광언(光彦)의 五대손 사인 해(楷)가 서울과 지방의 친족을 모아 봉분을 개축하고 돈을 내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벌(橃)에게 그 비문을 기록하도록 청하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대대로 전해 온 계파를 뒤에 기록하였다. 12대손 통정대부 수 황해도 관찰사 벌(橃)이 삼가 지음 <청화부원군 심용 묘갈을 직접 옮겨서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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