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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당진)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1. 10. 27. 15:33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송익필 선생은 선조 때 동인,서인으로 당쟁이 본격화 될 때 서인의 막후 세력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예전에 경기 광주에 있는 좌의정 안당 묘를 답사할 때 송사련이라는 인물이 등장했을 때 송익필을 찾아본 기억이 난다. 송사련은 송익필의 친부이다. 나중에 친부가 안처겸의 모반사건을 조작, 고발하였다는 것이 밝혀져 집안 전체가 노비로 환속하는 환천을 당했는데 이름을 바꾸며 도망다니기도 했다. 후에 정여립 모반사건과 관련하여 조종한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학문이 뛰어나 많은 제자를 길러낸 분으로 뒤에 신원이 회복 되었다.

     

    아버지는 서얼 출신 문신 송사련이며, 진외증조모는 좌의정 안당 가문의 노비였다. 그는 서인 예학의 태두인 김장생과 김집, 김반 부자 및 인조 반정의 공신 김유 등을 문하에서 길러냈다.
    서얼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출생 문제에 대한 시비 및 아버지 송사련이 안당 일족과 사림 인사들을 역모로 몬 것에 관하여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서인의 이론가이자 예학, 성리학, 경학에 능하였다.
    후일 안당의 증손부가 소송을 제기하여 환천의 위기에 처했으나, 제자 김장생의 숙부인 김은휘가 그의 일족을 배려하여 10년간 먹여 살렸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년)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1593년 9월에 석방되었다.
    사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가 1910년(융희 4년) 때 다시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할아버지는 직장(直長) 송인(宋璘)이고, 아버지는 판관 송사련(宋祀連)이다.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송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송익필은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노수신, 이산해 등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徐渻)·정홍명(鄭弘溟)·강찬(姜澯)·김반(金槃)·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崔岦)·이순인(李純仁)·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 대의 팔문장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했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다. 또한 아무리 고관·귀족이라도 한 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송익필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龜峯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한국민족문제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당진시 향토유적 제5호
    문화재명칭 입한재(立限齋)(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사당)
    소재지 충남 당진시 원당동 산 147(입한재:원당동 145)
    관리자(연락처) 여산송씨문경공파문중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및 재실 입한재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재실 입한재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재실과 여산송씨문경공파 사무실(자손성)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원경... 선생이 거처없이 돌아다니다 만년에 머문 당진에서 사망하자 문인들이 수습하여 현 위치에 안장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에는 후손들이 이곳에 거처하지 않은 것 같다.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구 묘표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석물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신 묘비...1993년도에 새로 세웠다.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측경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입수도두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후경... 

    ▼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후손들이 살지 않고 문인들이 수습한 곳 치고는 상당한 곳으로 보인다. 명당의 물이 모여들지 못하니 재물과는 인연이 박하다고 보인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묘 동영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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