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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왕릉답사가 나를 음인(陰人)으로 키웠다유용한것들/컴퓨터활용 2011. 4. 7. 19:50
◑ 첫번째 왕릉답사가 나를 음인(陰人)으로 키웠다
인생은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말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사람의 한 평생을 아우르는 말로 이보다 함축적인 말은 없을 거라 생각해 봅니다. 태어나서 관례(성년식), 혼례(결혼식), 상례(장례식), 제례(제사)를 치르는 일련의 과정이 곧 인생살이가 아닌가 싶어 제가 자주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 관례 ▼ 혼례 ▼ 상례 ▼ 제례
<사진출처:다음키즈짱 관혼상제>
젊음을 열심히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새롭게 인생의 변화를 모색하던 40대 초반에 저는 남들과는 다르게 특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탐독하면서 문화유산답사에 맛을 들이고 틈만 나면 절간으로 답사지로 찾아다녔습니다.
▼ 부여 무량사 극락전, 5층석탑, 석등.. 모두 보물로 지정됨.
어느 날 동구릉에 답사를 가서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답사하는데 강한 자석이 나를 끌어들이는 듯 나도 모르게 능상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왕릉의 능상은 개방을 안 하지만 그때는 권위주위 시대의 힘이 더욱 넘치던 때라 능 위로 올라가면 크게 혼나는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기억이 안나지만 누가 제재하는 하는 사람이 없었는지 무사히 능상 위로 올라가 건원릉의 뒤에서 앞쪽을 바라보는데 너무나 황홀했습니다. 처음 보는 풍경이었습니다. 그 매력에 흠씬 빠져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서의 업적과 죽은 뒤의 평가, 천하를 호령하던 왕의 모습과 그의 무덤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 동구릉의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전경
▼ 건원릉 뒤에서 무인석을 배경으로 바라본 후경
그날 왕릉 관리인에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능상에서 내려왔지만 내 머리 속에는 건원릉의 후경(능 뒤에서 앞쪽을 바라보는 광경)이 항상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로부터 조선 왕릉을 좀 더 공부해볼 생각이 들어 체계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동호회에 참가하고 선배들의 이야기도 듣고 하여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조선 왕릉답사를 시작했습니다.
▼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안내도
조선 왕릉은 지난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어 관리되고 있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인터넷 동호회를 중심으로 많은 답사가 이루어지고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많이 소개되었으며 왕릉의 아름다움이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국민적 관심이 상당히 높았었는데 세계문화유산이 되면서 더욱 확대되는 효과를 이뤘습니다.
조선 왕릉은 총 42기(연산군과 광해군은 묘로 분류)로 그중 북한에 2기(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의 후릉)가 있고 나머지 40기는 남한에 있는데 대부분은 서울 경기지역에 있으며 단 하나의 왕릉만이 강원도에 있습니다. 강원도에 있는 것은 다 아시다시피 세조에 의해 유배를 가서 사약을 받고 거기에 묻히게 된 단종의 장릉이 영월에 있습니다.
40기의 조선왕릉 중 대부분은 단독으로 있거나 한 두 기의 왕릉으로 존재하는데 그렇지 않고 무더기로 모셔진 곳도 몇 군데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구리시의 동구릉과 고양시의 서오릉입니다. 왕릉에 대한 것은 차차 풀어드리도록 하고 지금은 나의 첫 경험에 대한 것을 써야하니 조선 왕릉에 대한 내용은 여기서 줄일까 합니다.
▼ 조선왕릉의 정자각과 비각(우측건물)
주말마다 왕릉답사를 했는데 조선왕릉 40기를 모두 답사하는데 약 2년여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왕릉답사를 계속하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왕릉은 거의 정형화 되어있어 그게 그거고 거의 유사해 보였는데 그 안에 뭐가 다르길래 좋다 나쁘다하며 정치가 소용돌이 치고 천장(왕릉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거기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유배를 가는가? 하는 거였습니다. 거기에는 풍수라는 우리 고유의 철학이 담겨있었습니다.
▼ 동구릉에서 여주로 천장한 효종의 녕릉
왕릉에는 예외 없이 풍수논쟁이 배어있고 당대의 최고 국풍(나라에서 임명한 풍수관료)들이 연루되어 있으며 천장이라도 하면 처음 왕릉을 조성했던 국풍은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왕릉 조성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많이 나오고 특히나 민가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은 흥미로운 것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튼 왕릉 조성에 풍수가 개입이 되었다면 풍수를 알지 못하고서는 조선 왕릉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때부터 풍수를 공부하였습니다. 어언 10년이 넘었습니다.
▼ 정조가 풍수를 최대로 연구하여 조성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후경
그 이후에는 선현 묘를 찾아 밤낮없이 산하를 누볐고 우리나라에 명당으로 알려진 묘와 높은 관직을 누렸던 분들의 묘, 왕실 관련 묘, 명문집안에서 발복(發福)을 받은 묘 등을 꾸준히 답사하여 왔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말을 빌자면 허구한 날 남의 무덤만 보러 다닌다고 핀잔을 받곤 합니다.
어느 날 부터는 영역을 좀 더 확장하여 상장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다시금 돌아가는 마지막 길은 참으로 힘든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일은 무섭고 멀리하려하고 터부시 하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지만 세상이 원만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 주산이 삼태봉으로 아주 보기 좋은 월사 이정구 선생 묘역(3대 대제학을 배출한 연안이씨)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음양의 조화가 중요합니다. 매사 조화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하며 살아가는데 어느 한쪽이 과하거나 부족하게 되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건강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욕심도, 일상생활도 균형과 조화 속에서 진행이 되어야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밝고 아름다운 일면을 양(陽)이라 한다면 힘들고 어두운 것은 음(陰)이 됩니다. 세상일은 음양의 조화로 이뤄지는데 여기서 우리가 양음의 조화라고 하지 않고 음을 앞에 놓는 이유는 음은 생산과 창조와 부를 관장하며 세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여자가 음이고 남자가 양이니 여자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해가 갈 겁니다.
▼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놓는 배산임수의 전형인 땅 한양, 음양의 조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의 일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멋지게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음의 부분을 담당해서 사회의 조화를 이뤄야한다는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지닌 체 이 길을 매진하고 있습니다. 사회에 봉사하시는 많은 분들이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며 땀방울을 흘리시는 모습은 천사가 따로 없어 보였습니다. 저 또한 사회에 봉사하는 자세로 사회에 기여하는 음(陰)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 동영상>
▣ 풍수답사 샘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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