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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 조선 왕릉 29]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익릉답사는 즐거워/능원묘이야기 2011. 3. 14. 02:00
2010.11.01 760호(p80~82)
[신의 정원 조선 왕릉 29] - 주간동아꽃다운 19살 왕비 ‘마마’의 습격에 스러지다.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익릉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능원과 하늘의 신성함을 지키는 익릉의 홍살문(홍전문)
익릉(翼陵)은 숙종의 원비(元妃)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 김씨의 단릉이다. 익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안 서북 방향에 있다. 왼쪽 언덕에는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그의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순창원이 있으며, 오른쪽 언덕에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수경원이 있다. 수경원은 원래 신촌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근처에 있던 것을 1970년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영빈 이씨는 인경왕후의 며느리 격이다.
이곳에는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익릉,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희빈 장씨의 대빈묘, 며느리인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홍릉과 영빈 이씨 수경원이 있어 숙종의 가족묘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왕실의 무덤 형태인 능원묘(陵園墓)를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왕실의 유택은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능·원·묘로 구분한다. 능(陵)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추존 왕비의 무덤을 가리키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친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이다. 그 밖에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과 같이 묘(墓)라 칭한다. 왕비로 있다가 강등된 희빈 장씨의 무덤은 묘의 형식이며, 최근 종영한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은 숙종의 빈이자 영조의 사친이 주인이므로 원의 형식을 따랐다.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에 자리한 소령원은 대표적인 원 중 하나로 어머니에 대한 영조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조영미가 뛰어나며, 무엇보다 신도비의 조각은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인경왕후의 아버지는 김장생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이고, 어머니는 청주가 본인 한유량의 딸이다. 김만기는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열의 문하생이었으며 침착하고 후덕한 성격으로 특히 딸이 왕비가 된 뒤 더욱 말을 삼가고 행동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그의 형은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이다. 이들은 대제학을 지내고 현종과 숙종 대의 공신으로 종묘에 올라가 있다. 인경왕후는 당대 최고 명문가의 규수였다.
인경왕후는 현종 2년(1661) 9월 3일 서울의 회현방(會賢方)에서 태어났다. 날 때부터 울음소리가 약하고 조용했으며, 자라서도 말수가 적고 존귀함이 있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있으면 기다렸다 모두 모인 뒤 나누고, 화려함을 자제하고 품성을 갖춰 사가에서는 인경왕후를 “천제(天帝)의 누이동생 같다”며 극찬했다. 왕실에 들어와서는 가언(嘉言·좋은 말)과 선행을 즐겨 듣고 삼궁(三宮)과 사성(四聖)을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했으며, 몸이 아플 때도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 부모의 이부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아침에 안부를 묻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 효부였다.
인경왕후는 1670년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숙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됐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됐다. 그러나 왕실 생활 10년째인 1680년 두창(痘瘡·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생소한 전염병 발병 10여 일 만에 급사
1680년 10월 경덕궁(경희궁)에 있던 중궁이 천연두에 감염되자, 숙종은 집무실을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 대신 영의정이 홍화문에 머물면서 양쪽 궁궐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인경왕후는 발병 10여 일 만인 10월 26일 자정 숨이 차서 헐떡거리다 급작스럽게 승하했다. 생소한 전염병이라 주치의들도 손쓸 길이 없었다.
왕비의 죽음을 숙종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숙종도 며칠 전부터 구토를 하고 가슴과 배에 통증을 느껴 대신 자전(대비)에게만 알렸다. 임금 모르게 대궐 밖 파자전교(把子廛橋)의 큰길에서 망곡례(望哭禮)를 하려 했으나 숙종이 먼저 알아차리고 약방제조와 의원들을 데리고 왕비에게 가서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그러나 삼정승은 여러 핑계를 대고 빠졌다. 급성전염병 마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례가 서둘러 진행되는 과정에서 임금이 하루 늦게 알았다는 이유를 들어 논의가 벌어졌다. 즉 사망을 안 날로부터 성복(成服)을 하느냐, 죽은 날부터 계산해서 성복을 하느냐의 논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산 사람의 일은 이튿날부터 계산하고(生輿來日) 죽은 사람의 일은 죽은 날부터 계산한다(死與往日)”로 돼 있다. 성복은 산 사람의 일이므로 죽은 이튿날부터 계산해 3일 되는 날 행하고, 염(殮)과 빈(殯)은 죽은 사람의 일이므로 죽은 날부터 계산해 행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이 염과 빈을 성복보다 하루 먼저 시행하는 이유다.
남성을 상징하는 지형에 터를 잡은 명릉(오른쪽)과 영월
장릉.인경왕후가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승하해, 혹시 소생의 기대를 갖고 임금의 병세도 고려해서 우왕좌왕하다 복례(復禮)를 미뤘다. 결국 새벽 삼경 복례를 했다. 복례란 사람이 죽으면 즉시 윗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 “아무개 복(復·돌아오라)하라”고 세 번 사자의 이름을 부르는 장례의 첫 번째 예다. 이 또한 임금에게 늦게 알리면서 벌어진 일이다.
결국 이 논쟁은 부음을 받은 날이 26일인 자와 27일인 자를 나눠 성복례를 행했다. 경덕궁에 있던 사람들은 26일을 기준으로 성복례를 하고, 창덕궁에 있던 신하들은 27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숙종은 27일로부터 만 30일 뒤 대행왕비의 옷을 벗었고, 백관은 소식(素食)을 중지했다.
급성전염병에 대한 두려움과 왕실 및 조정의 국장례 절차와 위기관리 능력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익릉은 숙종 연간에 조영됐으나 숙종이 능제(陵制)를 단순화하라는 교령(敎令)을 내리기 전의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오례의(五禮儀) 제도를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반영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익릉은 인조 장릉 이후 지세가 비좁은 경우를 고려해 줄였던 능제를 시조부모 능인 영릉(寧陵)의 양식에 따랐다.
능침 봉분은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다른 왕릉과 달리 석주가 아닌 동자석 상단에 십이간지를 글자로 새겨놓았다. 문석인은 숭릉(崇陵)의 것보다 작은 245cm이다. 조관을 썼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뒷면의 관대에는 꽃문양이 보인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표정이 살아 있다. 짧은 목에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턱을 홀 바로 위에 올려놓은 형상이 재미있다. 무석인은 문석인의 유연함에 비해 장군의 근엄함이 두드러진 모습으로, 투구에 있는 상모를 뒤로 넘겼다. 갑옷의 바탕은 솟을 고리문이며, 투구 끈은 턱 밑에 있다. 반월형의 요대(腰帶) 안에는 상서로운 구름무늬가, 양손의 위아래에는 귀면(鬼面)이 각각 조각됐다. 갑옷의 어깨 부분에는 아주 작은 귀면을 넣었고, 소매는 활동하기 편리하게 터놓았다. 흉갑 부분은 구름으로 장식돼 있고, 칼을 잡은 손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됐다.'답사는 즐거워 > 능원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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