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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중랑]장군의 아들로 영의정이 된 신경진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0. 25. 10:00

    장군의 아들로 영의정이 된 신경진 묘 및 신도비

     

    신립장군의 아들인 신경진의 묘와 신도비는 서울에 있다. 그런데도 번번히 기회를 놓쳐 직접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도많이 사진이나 글을 통해 봐서인지 무척 익숙하다. 서울과 인근에 있는 묘소 중 리스트에 

    올려놓고 미쳐 가보지 못한 곳을 하루 날 잡아서 다녀왔다. 이번에는 주로 하남시의 묘소를 다녀왔다.

    신경진의 묘는 열쇠로 굳게 닫혀있다. 궁여지책으로 밖에서 철담장 사이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찍었지만 

    영 아니었다. 그래서 인근에 있는 평산신씨 사무실을 찾았는데 마침 문중어른 한분이 계셔서 친절하게 

    열쇠를 열어주셨다. 감사드린다.

    답사를 하다보면 이런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시는 분들은 다 알것이다. 이런 친절함이 얼마나 고마운지...

    신경진 묘는 원래 산진처에 위치해 좋은 기를 받았음직하지만 지금은 민가에 둘러싸여있고 입수처 문중

    사무실 부근에 맥을 가로질러 길을 내는 바람에 묘만 덩그마니 혼자 있는 꼴이 되었다. 어떤 문중은 묘의 

    기맥을 보호하기 위해 길을 내면서 엉뚱한 터널을 만들었다고 언론으로 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던데 이곳은 

    오히려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크게 훼손하지 않고 겨우 길 하나 낸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듯... 

    신경진(申景禛)
    1575년(선조 8)∼1643년(인조 21). 조선 인조 때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수(君受). 서울 출신. 도순변사(都巡邊使) 입(砬)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전망인(戰亡人)의 아들이라 하여 선전관으로 기용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뒤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으나 일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왜사(倭使)의 접대를 거부하여 체임되었다. 이어서 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그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구인후(具仁垕) 등과 모의, 그와 인척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 仁祖)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뒤 기회를 노리다가 1622년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거사준비를 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 1623년의 인조반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반정 직후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병조참지에 임명되었고, 곧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訓鍊)·호위(扈衛)·포도청의 대장을 겸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 때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일등공신(奮忠贊模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훈련대장으로 어가(御駕)를 호위하였으며, 평정 후 역도에 의하여 추대되었던 흥안군(興安君) 제(瑅: 선조의 열째아들)를 처형하여 이로써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을 믿고 자못 탐오(貪汚)하여 남의 집터 수천칸을 뺏은 것으로 언관의 탄핵을 받았으며, 1635년에 목릉(穆陵)·혜릉(惠陵)의 봉심관(奉審官)으로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하였다가 곧 복직되어 형조판서에 훈련대장을 겸하였고, 1636년 병조판서를 겸하도록 하였으나 질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하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의 선봉부대를 차단,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여유를 주었으며, 청나라와의 화의성립 후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37년 좌의정 최명길의 추천에 의하여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하였는데, 이때 난 후의 민심수습책을 논하고 수령의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개진하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으며 돌아와 좌의정으로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의논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은밀히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그간의 사정을 변명하도록 하였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구금되어 있던 김상헌(金尙憲) 등을 옹호하였으며,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퇴, 이듬해 재차 영의정에 임명된 지 열흘도 못 되어 죽었다.
    그는 무인가문출신의 손꼽히는 장재(將材)로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서 항상 훈련도감·호위청 등의 친병(親兵)을 장악하고 왕의 신변을 책임졌다.
    상신(相臣)으로 있으면서 특별히 건의하여 이루어놓은 시책은 없으나, 청나라와 외교적 교섭에 능하여 청나라의 과도한 징색(徵索)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정 후 서인이 훈서(勳西)·청서(淸西)로 분열하자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 등과 함께 훈서의 영수가 되었으나 무신임을 들어 조정의 시비에 간여하기를 극력 회피하였으며, 오히려 송시열(宋時烈) 등의 사림을 천거하고 장용(奬用)함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샀다.
    한편으로는 공을 믿고 탐오한 면도 있어 식자층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무인이면서도 김류·이귀·최명길 등의 문인들과도 널리 교유하였는데, 특히 김류와는 선대의 인연(瑬의 아버지 金汝岉은 申景禛의 아버지 砬의 從事官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51년(효종 2)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문이 전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5호
       충익공 신경진 묘역(忠翼公 申景禛 墓域)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69-1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381-1(주차장)
       평산신씨 충장공파 종중


     

     

     

     

     

     

     

     

     

     

    신립장군 가계도
    18세
    신상
    이조판서
      19세
    신화국
      20세
    신립
    도순변사
      21세
    신경진

    영의정
      22세
    신준
    형조판서
      23세
    신여정
    (생부:신여식)
      24세
    양자:신완
    영의정
      25세
    신성하
    평운군
           

     


    신경진(1575∼1643)의 묘역과 신도비

    조선왕조 인조 때의 명신 신경진(1575∼1643)의 묘역과 신도비이다. 신도비에는 고려 왕건의 충신이던 신숭겸(申崇謙)과 조선 세종 때의 명신 신개(申槪) 등 그의 선조에 대해 약술되어 있고, 이어 광해군·인조 때 활약한 그의 행적이 적혀있으며, 말미에 부인과 자손의 명단 및 명문(銘文)이 새겨져있다.
    신경진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수(君受)로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 패하자 자결했던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의 큰아들이다. 부친의 공적으로 선전관(宣傳官)에 기용되었고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였다. 태안군수ㆍ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로 발탁되나 왜인과 접할 수 없다고 하여 면직을 주청, 갑산부사로 체직되었다. 그 뒤 남도병영 우후(虞候), 경원부사, 벽동군수로 옮겨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공조참의, 병조참지가 되었고, 곧 병조참판에 제수되어 훈련·호위·포도대장을 겸하였다. 얼마 뒤 정사공신(靖社功臣) 일등으로 책록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에 오르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져 비변사의 일을 겸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亂) 때 훈련대장으로 임금을 호위하고 적을 토벌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뒤 이괄이 추대한 왕자 흥안군(興安君) 제(瑅:선조의 10남)를 마음대로 처형했다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뒤 형조판서가 되어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부원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병 때문에 체직되었고, 그 해 겨울 오랑캐가 침입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인조를 따라 산성의 동쪽 문을 굳건히 지켰다. 이듬해 다시 병조의 일을 맡았고,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었다. 1638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에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논의, 승려 독보(獨步)를 명(明)에 은밀히 파견하여 청(淸)에 항복한 그간의 사정을 변명토록 하였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에 다녀왔고, 1642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퇴, 이듬해 3월 영의정에 재임명된 지 열흘이 못되어 사망했다.
    신경진은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주도하여 왕의 절대신임을 받았고 친병을 장악하여 호위를 책임졌다. 청과의 외교에서 과도한 징벌과 잦은 내정간섭을 철회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 등 문인과 널리 사귀었는데, 특히 부친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진왜란 때 함께 자결한 김여물(金汝 )의 아들 김류와 절친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효종 2년(1651)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원래 청주 땅에 있었으나 뒤에 경기 양주의 아차산으로 개장되었다.
    비는 화강암 귀부(龜趺) 위에 대리석제 비신(碑身)과 개석(蓋石)을 얹은 형태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예이다. 귀부는 비신에 비해 크고 둔중하며, 개석은 추녀 끝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지붕 위에 쌍룡이 틀고있는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전(前)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글씨는 사간원 정언 박태유(朴泰維)가 썼는데 안진경(顔眞卿) 풍이 가미된 단정한 해서이다. "領議政平城府院君忠翼申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

    <서울문화재 사이트에서 인용>


     

     

     

     

     

     

     

     

     

     

     

     

     

     

     

     

     

     

     

     

     

     

     

     

     

     

     

     

     

     

     

     

     

     



    ▼ 신경진 묘 앞에 있는 신도비.. 

     

     

     

     

    ▼ 신경진 신도비 앞에 있는 묘... 철문이 굳게 잠겨있다.

    ▼ 평산신씨 문중어른의 호의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 신경진 묘 우측에 주차장이있고...  문인석 뒤로 신도비가 보인다. 

     

     

    ▼ 신경진 묘 입수처.. 그 뒷쪽으로 길을 내면서 맥이 잘렸다..

    ▼ 신경진 묘 후경.. 앞쪽으로 건물들이 들어서있어 답답하다.. 그나마 문화재라도 있으니까 이땅이

    보호된 것이리라.. 문화재의 새로운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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