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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남양주]남양주 능성구씨(구인기,구일,구상정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1. 26. 14:00

    남양주 능성구씨(구인기,구일,구상정 묘)

     

    남양주 능성구씨 묘역에는 구사맹과 구굉 묘역이 있어서 찾게 되는데 그곳에는 후손들 묘역이 같이 있다. 이번 답사에는

    구굉 선생의 아드님인 구인기 묘역은 떨어진 곳에 있어서 답사를 하지 못했다.

    다른 후손은 묘역 안에 같이 있어서 가능했지만 모두 새롭게 이장해 온 묘역으로 보인다.

    ps:구순선생과 구인기선생의 묘를 답사하지 못해 뭔가 허전해서 그 다음주에 두곳을 다녀와서 수정하여 올립니다.

    구인기(具仁墍)
    1597년(선조 30)∼1676년(숙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계의(季依).
    아버지는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이다. 큰아버지 구성(具宬)의 문인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함께 공부하였으며,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는 고모가 된다. 광해군이 점술인의 말을 듣고 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죽이자 친척들이 화를 두려워하여 출입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내왕하였으며, 인조반정에 참여하였다.
    인조즉위 이후 아버지와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고, 군자감판관·충훈부도사·선공감첨정·홍천현감·김제군수 등의 내외직을 거쳤다.
    1640년(인조 18)에 첨지중추부사로 심양관(瀋陽館)에 파견되었고, 돌아와 1645년 수원부사가 되고 능풍군(綾豊君)에 봉해졌으며, 그뒤에 한성부좌윤·공조참판·총융사 등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이후 병을 핑계삼아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냈으며, 1675년에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반정에 처음부터 깊이 관여하여 반정하던 날 인조를 사저에서 직접 모셔 즉위하게 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 심양에 파견되어서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문밖 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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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정
       남양주 능성구씨(구인기,구일,구상정 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산93-1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745-1(철길 밑에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감)
       능성구씨


     

     

     

     

     

     

     

     

     

     

    구일(具鎰)
    1620년(광해군 12)∼1695년(숙종 2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중경(重卿). 증조부는 구사맹(具思孟)이며, 할아버지는 구굉(具宏)이고, 아버지는 구인기(具仁墍)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가 되고, 1644년 세마(洗馬)를 거쳐, 1646년 공신의 적장자(嫡長子)라 하여 품계가 올라 와서별제(瓦署別提)가 되었다.
    1656년(효종 7) 금부도사가 되고, 1658년에 횡성현감으로 나가 묵은 땅을 개간하는 등 치적이 있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64년(현종 5) 남평현감을 거쳐, 1667년에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이 되었다.
    1668년 무과별시에 급제하여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훈련원부정을 역임하고 이듬해 홍양영장(洪陽營將)이 되었는데,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여 왕의 특령으로 해직을 허락받았다.
    1670년에 장단부사가 되고 얼마 후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72년에 경기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
    1674년 금군별장(禁軍別將)을 거쳐 1675년에 한성부우윤으로 승진되고 총관(摠管)이 포도대장을 겸하였다.
    1678년(숙종 4) 능평군(綾平君)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당시 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이 세력을 믿고 양가의 부녀를 겁간한 일이 있었는데, 그 죄를 다스렸다가 오히려 무고(誣告)를 입어 김해에 유배되었다.
    1680년 특별히 한성부판윤 겸 총융사(摠戎使)에 임명되고, 1688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당하여 송추에서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등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구상정(具尙禎)
    1658년(효종 9)∼1709년(숙종 35). 조선 후기 문신·유학자. 자는 상보(尙甫)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구수영(具壽永)의 후손으로, 고조는 좌찬성(左贊成) 문의공(文懿公) 구사맹(具思孟)이고, 증조는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충목공(忠穆公) 구굉(具宏)이며, 조부는 능풍부원군(綾豐府院君) 충간공(忠簡公) 구인기(具仁墍)이다. 부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능평군(綾平君) 구일(具鎰)과 모친 이조참판(吏曹參判) 이행진(李行進)의 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봉사(奉事) 이홍저(李弘著)의 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가문 대대로 왕실(王室)과 인척을 맺은 일족이며, 인조반정 후 가문의 인척들이 중신(重臣)으로 기용되면서, 공훈(功勳)이 더욱 높아진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관직은 젊을 때 음직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올랐다. 그 후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감찰사어(監察司禦)·충훈도사(忠勳都事)·낭천현감(狼川縣監)·장수현감(長水縣監)·천안군수(天安郡守)·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겸 훈련대장(兼訓鍊大將) 구성임(具聖任)·황주목사(黃州牧使) 구성필(具聖弼)·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구성익(具聖益)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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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양주 능성구씨 묘역의 구사맹, 구굉 묘역.  

     

    ▼ 능성구씨 묘역 배치

    ▼ 능성구씨 신도비

    ▼ 신도비 정면.. 우측에 있는 신도비가 구인기 신도비...

    ▼ 구인기 신도비...

     

     

    ▼ 구인기 묘 전경...  

    ▼ 구인기 묘 

    ▼ 구인기 묘비 

    ▼ 구인기 묘 석물 

     

    ▼ 구인기 묘 후경 좌,우 

     

    ▼ 구인기 묘 후경... 앞쪽 백호끝자락에 구수영, 구회경 묘가 있다. 

     

    ▼ 구일 묘 원경

    ▼ 구일 묘

    ▼ 구일 묘비

    ▼ 능성구씨 묘역 배치

     

    ▼ 구상정 묘

    ▼ 구상정 묘비

    ▼ 구상정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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