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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한원군 이유청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 3. 10:00

    한원군 이유청 묘

     

    이축선생 묘 위에는 5대손 이덕형 묘가 있고 그 윗쪽 능선에는 최근에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청 묘가 있다. 이유청은 이축

    선생의 손자로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이유청에 대한 것은 전혀 모르고 있다고 이축

    선생 묘 답사 때 윗쪽에 문화재안내판이 있어 그걸 보고 알았다. 고양시 문화관광사이트는 2010년 이후에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아 최근 자료는 전혀 없는 상태다. 공무원조직은 참으로 더디다. 그래서 민간에 이양할 것이 많은게 사실

    이다. 문화관광 같은 것은 민간에 과감히 이양해서 신속한 자료보강이나 안내판 수정 등이 이뤄져야 한다.

    기묘사화 중심인물들은 사림에서는 지탄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최근들어 묘지들이 문화재로 등극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는 조금은 이상한 현상으로 보인다. 문화재답사.. 그 중 묘지답사를 다니다보면 과거에 지탄 받았던 인물들이 근자에

    묘역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경우가 있어 뭔가 찜찜한 느낌이 많이 든다. 그 인물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있었다면 적나라

    하게 밝히겠지만 연구도 부족한데 그럴수도 없고 대략적인 약력으로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으로 보이고......

    지자체에서 문화재를 지정할 때는 그 사람의 과거 행적도 많이 참작을 해야할 듯 하다.

    이유청(李惟淸)
    1459년(세조 5)∼1531년(중종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직재(直哉).
    이색(李穡)의 현손으로, 참찬 이훈(李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딸이다.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표연말(表沿沫)·유숭조(柳崇祖) 등과 사유(師儒)로 선발되었다. 1491년 지평이 되고 1493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다시 지평으로 강등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집의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온건하게 처리하려다가 배척되어 영서도찰방(迎曙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연루되어 장(杖)100을 받고 직첩이 환수되었으며 관노(官奴)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1506년(중종 1) 사헌부집의로 복직되고, 정난공신(定難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대사헌·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1511년 황해도관찰사, 이어서 1513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
    1517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는데, 1519년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을 몰아내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워 우의정이 되고 한원군(韓原君)에 봉하여졌다.
    1521년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공편(恭編)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고양시 향토유적 제54호
       한원군 이유청 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44-3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44-3(이축묘 위 10m)
       한산이씨


     

     

     

     

     

     

     

     

     

     

    원당읍(元堂邑) 도내 4리(道乃 4里)에 위치하며,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의 기(基)와 합부(合 )하였다. 봉분(封墳)의 주위에는   장명등(長明燈) 1, 상석(床石) 1기(基)와 문인석(文人石) 4구(軀)가 세워져 있다. 묘(墓)  앞에는 2 개의 묘비(墓碑)가 있는데 구비(舊碑)의 크기는 폭 45cm, 두께 20cm,  높이 176cm이며 신비(新碑)는 1957년 4월에 개립(改立)된 것으로 폭 48cm, 두께 23cm, 높이 120cm이다.
      이유청(李惟淸)은 조선시대 문신으로서 세조(世祖) 5년(1459)에 출생하여 중종(中宗) 26년(1531)에 사망하였다. 자(字)는 직재(直哉)이며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으로 참찬(參贊)  훈(塤)의 아들이다.

    성종(成宗) 17년(1486)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燕山君) 4년(1498)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집의(執義)로서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반대했다가 삭주(朔州)에 유배된후 3 년만에 풀려나왔다. 그러나 곧이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삭직(削職)되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재등용(再登用)되어 집의(執義),  동부승지(同副承旨)등을 지내었다.

    중종(中宗)2년(1507)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고  그후 우부승지(右副承旨),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헌(大司憲),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중종(中宗) 3년(1508) 공신(功臣)에 오르지 못한 신복의(辛服義) 역모건(逆謀件)에 연류되어 또다시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  1511년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중심인물이 되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을 숙청하여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다.
    그후 등극사(登極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중종(中宗) 18년(1523)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영경정사(領經 事)를 겸하였으며 중종(中宗)23년(1528)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어 궤장( 杖)을 하사받았다. 시호(諡號)는 공호(恭胡)이다.(공편(恭編), 공희(恭僖) 등으로 정확하지 않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이유청 묘 안내판.. 

    ▼ 이유청 묘 전경 

    ▼ 이유청 묘  

    ▼ 이유청 묘 신 묘비 

    ▼ 이유청 묘 구 묘비 

    ▼ 이유청 묘 석물... 

     

     

    ▼ 이유청 묘 후경... 묘 앞쪽으로 후손들의 묘가 있다. 

     

    ▼ 이유청 묘 아랫쪽에는 이유청 후손들 묘가 있다. 정확한 이력을 알 수 없어 그냥 사진만 올린다.

    후손 이덕근 묘... 

    ▼ 이덕근 묘 석물  

     

    ▼ 이덕근 묘 전경 

     

    ▼ 이유청의 손자 이계 묘 전경...

     ▼ 이계 묘표...

    ▼ 이계 묘 석물 

     

     

    ▼ 이유청 묘 아래에 묘는 묘표의 글씨를 판독하지 못하여 누구묘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묘

    아랫쪽에 이유청 손자 묘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묘는 이유청 아들 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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