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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황치신 신도비 및 묘소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 5. 10:00
황치신 신도비 및 묘소
영의정 황희의 아들들이 몇 명 나오는데 제일먼저 황중생(노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이 동궁의 물건을 훔쳐 구속되면서
2남 황보신이 관여되었음이 밝혀지고 나중에 황치신(1남)은 과전반납 과정에서 사기를 치려한 혐의로 호조참판에서
파직당하는 수모를 겪게된다. 3남 황수신은 부친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지만 조선왕조의 대 정승
으로 18년간이나 영의정을 역임한 황희의 명성은 아들들때문에 땅어 떨어지는 일을 겪게 된다.
황치신 묘가 문화재로 지정되어있어서 한 번 찾아가보려고 몇번 망설였는데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날 찾게 되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도 아무도 없는 묘역을 오르는데 주위에 군부대가 있어 사진을 찍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군부대 안쪽에 문화재로 지정된 묘가 있는데 누구의 묘인지 몰라 멀리서 사진만 찍어서 집에와 확인해보니
임진왜란 전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 묘였다.
황윤길 묘는 별도로 찾아가기 전까지는 이곳에 함께 올려 보관토록 하겠다. 추후에 군부대를 통해 다녀오게 되면 별도로
올릴 예정이다.
황치신(黃致身)
1397년(태조 6)∼1484년(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맹충(孟忠). 초명은 동(董)으로, 태종이 동중서(董仲舒)가 다시 났다고 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영의정 황희(黃喜)의 아들이다.
태종에게 불려 나가 이름을 하사받은 뒤 음보(蔭補)로 공안부부승(恭安府副丞)이 되었으나, 얼마 뒤 그 이름이 형제들과 맞지 않다 하여 다시 치신이라 고쳐 하사받고, 곧 사재직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사섬시주부가 되었다가 1415년(태종 15) 통례문봉례랑을 거쳐 감찰이 되고, 곧이어 호조좌랑과 사온서영(司醞署令)을 역임하였다.
1426년(세종 8) 형조정랑이 되어서는 세도가에서 민간을 잡아다 노비로 만들어 50여년간을 소송하던 적체된 사건을 해결하였다.
이듬해 호조정랑으로 익찬(翊贊)을 겸임하였으며, 곧이어서 판통례문사 겸 상서소윤(判通禮門事兼尙瑞少尹)이 되었다.
1433년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1435년 예조참의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437년에 중추원부사가 되었다가 곧이어 한성부윤으로 옮겼다. 그의 탁월한 정치능력이 인정되어 경기도도관찰사와 경창부윤을 거쳐, 형조와 호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444년 호조판서에 승진하여 곧 판한성부사로 옮겼다.
1448년 모친상을 당하여 사임하고, 1452년(문종 2) 부친상을 당하여 거상하였다.
1454년(단종 2) 다시 중추원사에 임명되고, 하성절사(賀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도진무사(都鎭撫使)를 겸하였다.
1457년(세조 3)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곧이어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었다가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옮겼다.
1461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가 남의 노비를 빼앗은 죄목으로 파직당하였다.
1466년 동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으로 복관되어 1479년(성종 10)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호안(胡安)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고양시 향토유적 제43호 황치신 신도비 및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산72-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산72-1(388-2 옆에 사당있음) 장수황씨
신도읍(神道邑) 지축 1리(紙丑 1里) 덕수촌(德水村)에 위치하여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황씨(黃氏)와 합폄(合 )하였다. 이수( 首)를 갖춘 신도비(神道碑)는 폭이 85cm, 높이가 150cm이며, 비명(碑銘)은 김종직(金宗直)이 짓고 안심(安?)이 썼다.
황치신은 조선시대 문신(文臣)으로 초명(初名)은 동(董)이며 자(字)는 맹충(孟忠)이다. 본관(本貫)은 장수(長水)로써 영의정(領議政) 희(喜)의 아들이다. 따라서 부(父)의 음덕(蔭德)으로 공안부부승(恭安府府承)이 되고, 태종(太宗) 15년(1415)에 통례문례랑(通禮門禮郞)을 거쳐 감찰(監察)·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세종 14년(1432)에는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및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등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그후 예조참의(禮曹參議), 중추원부사한성부윤(中樞院副使漢城府尹)을 역임하였으며, 형조(刑曹)와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세종 26년(1444)에는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승진하였다. 단종(端宗)이 즉위한 뒤에는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세조랑위년간(世祖郞位年間)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냈다. 그러나 세조(世祖) 7년(1461) 타인(他人)의 노비(奴婢)를 빼앗았다하여 삭직(削職)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후 5년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복관(復官)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사후(死後)에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호안(胡安)이다.▼ 황치신 선생 묘 원경..
▼ 황치신 선생 묘 안내판
▼ 황치신 선생 묘 안내판
▼ 황치신 선생 신도비
▼ 황치신 선생 신 신도비
▼ 황치신 선생 묘 전경
▼ 황치신 선생 묘..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 황치신 선생 묘표
▼ 황치신 선생 묘 장명등
▼ 황치신 선생 묘 석물
▼ 황치신 선생 묘에서 바라본 신도비각
▼ 황치신 선생 묘 입수처
▼ 황치신 선생 묘 후경
▼ 황치신 선생 묘 좌측에 있는 부봉
▼ 황치신 선생 묘에서 바라본 황윤길 묘
▼ 황치신 선생 묘 앞에 있는 사당...
황윤길(黃允吉)
1536년(중종 31)∼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 황희(黃喜)의 5대손으로, 황징(黃懲)의 아들이다.
1561년(명종 16)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을 거쳐 1567년 지평이 되었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황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병조참판을 지냈다.
1590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선임되어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수행원 등 2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거쳐 대판(大阪)으로 가서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豊臣秀吉) 등을 만나보고 이듬해 봄에 환국하여, 국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서인에 속한 그가 일본의 내침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나, 동인에 속한 김성일이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 없고 군사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여 일본 방비책에 통일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당시 그의 말을 좇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한다.
한편, 그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鳥銃) 두 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바쳤지만, 조정에서 그것을 실용화할 계획을 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고양시 향토유적 제55호 황윤길 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72-15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산72-15(황치신 묘에서 볼 수 있음) 장수황씨
▼ 황치신 선생 묘에서 바라본 황윤길 묘.. 군부대 철조망 안에 있다.
▼ 황윤길 선생 묘 원경
▼ 황윤길 선생 묘
▼ 가을비 속에서 진행된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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