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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봉사공 윤지득(奉事公 尹之得)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 19. 10:00
봉사공 윤지득(奉事公 尹之得) 묘
고양시 풍수 묘지답사를 점검하다보면 고양군지(고양시지)의 인물편에도 나와있지 않은 한 분이 있다. 바로 윤지득이란 분이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주소가 없어서 엄청 고생하며 찾았는데 결국 행주기씨 묘역 안에 있다고만 되어있어서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대충 어디쯤에 있겠지 하고 나섰다가 기건선생 묘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다가 우연히 찾았다. 알고보면 쉬운데 처음 자료없이 찾아나설 때는 난감했던 곳이다. 뒤에 오시는 분들을 위해 지도에 표시를 했으니 쉽게 찾길 바란다.
윤지득선생은 본인보다 후손들이 엄청 발복을 한 묘라서 풍수간산을 자주 하는 곳이다. 남원윤씨의 후손 중 윤지득선생 후손이 제일 크게 일어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주기씨 선산에 뭍혀있는데 말 그대로 사위발복, 외손 발복의 한 단면이다.
답사한 날에도 행주기씨 묘소 어디에도 꽃 한송이 없었는데 윤지득선생 묘에는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봉사공 윤지득(奉事公 尹之得)
공의 諱(휘 이름)는 之得(지득)으로 고려 건국공신 諱 莘達 태사공의 十六대손이고 남원 윤씨 시조인 남원백 諱 威공의 七대손이시다. 남원백께서는 여진을 정벌한 윤 관 장군의 첫째 증손자로 남원지방의 난리를 선무평정한 공으로 작위와 남원윤씨 본관을 받은 분이시다.
공의 할아버지는 고려조 때 공조전서를 지낸 諱 璜공이며 아버지는 조선 태종조에 함길도 관찰사를 역임한 청백리 諱 臨공이고 어머니는 貞夫人 靈光丁氏로 공조전서 文衍공의 따님이시다.
공은 서기一四二0년전후에 탄생하여 繕工監 奉事(선공감봉사)를 지내셨고 壽를 누리시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위는 행주기씨로 공조전서 勉(면)공의 따님이시다.
공은 슬하에 一男 四女를 두셨는데 아드님은 군자감 판관을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된 諱 訔(은:一四四七년생 一五二八년졸)공이며 따님 네분은 상장군 尹從周공 현감 禹戎老공 병절교위 吳致和공 절도사 金哲孫공에게 각각 출가하셨다.
공의 장형 諱 之定공은 현감, 차형 諱 之靜공은 사정, 셋째 형 諱 之安공은 문과급제 후 봉례, 넷째 형 諱 之慮공은 문과급제 후 사간, 제 諱 之行공은 현감을 각각 지내신 명문 집안이다. 공은 배위와 함께 자손을 훌륭하게 길러 아드님의 현달에 이어 손자 네 분 중 세분이 문과에 급제하는 등 가문의 중흥에 초석을 놓으신 분이시다.
공의 증손 諱 潔공은 시문이 당대에 제일인으로 독서당에 들었고 현손 諱 民新공의 다섯 아들(昫, 曙, 咭, 㬚, 晫)이 문과에 급제하여 명예를 드높였으며 十二대손 諱 行恁공은 대제학을 지낸 거목이었다. 후손 중 조선조에서 영의정에 증직된 분이 六人, 판서를 지낸 분이 七人, 문과급제한 분이 四十七人, 諡號(시호)를 받은 분과 封君(봉군)된 분이 각각 十一人, 한성판윤을 지낸 분이 三人으로 모두 깨끗하고 존경받는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상주북천전투에서 순국하신 五대손 문열공(諱 暹)과 병자호란 때 남양부사로 근왕병을 모집하다가 순국한 충간공(諱 棨) 및 당시 남한산성에서 끝내 항복을 거부하고 심양에 끌려가 순국한 삼학사 중 한분인 충정공(諱 集)의 충절은 만세에 귀감이 되며 후손 중 일제 침략시기에 무력투쟁과 기미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러 대한민국 건국 후 서훈된 애국지사가 諱 泰英 秉昭 周燮 在鋈 在英공 등으로 이들의 높은 뜻은 충절가문의 전통을 빛냈다.
一七一二년 八대손 휘 德駿공이 畿伯이 되어 비를 세운 것이 마모되어 십여년전 한 종인이 독자 개수한바 있으나 종중에서 이 비석을 새로 세운다.
<봉사공 윤지득 비문내용을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봉사공 윤지득(奉事公 尹之得) 묘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451-2인근(행주기씨 선영내)
관리자(연락처)
남원윤씨
기씨부인은 여말(麗末)의 공조전서(工曹典書)였던 기면(奇勉)의 딸이었다. 원(元)나라의 궁녀로 들어가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았고 자신의 소생인 황태자(昭宗)가 왕위에 오른 기황후(寄皇后)의 집안이었으니 명문중의 명문이요 당대의 세도 집안이었다. 그런데 시집 온지 얼마 안되어 남편 윤지득이 세상을 떠나자 기씨부인은 청상과부의 몸으로 현재의 성사동인 고양(高揚) 사근동의 친정에와서 머믈게 되었다. 당시 기씨 부인의 뱃속에는 유복자가 자라고 있었다.
친정에 와서 얼마 안됐을 때 기씨 부인은 다시 친정 아버지 상을 당하게 되었다. 이름있는 집안인지라 지관들이 불려 오고 마침내 명당이라는 묘자리가 마련 되었다.
장례를 모시기 하루 전날밤이었다. 기씨 부인은 아무도 모르게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가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묘를 쓰기 위해서 파놓은 구덩이에 연신 물을 길어다가 부었다. 중간에다가 물을 엎지르면 흔적이 날세라 조심 조심 물을 날랐고 금새 물이 땅속으로 스며 들기 때문에 같은 일을 밤이 새도록 반복 해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묘자리를 둘러본 상주들은 그야말로 망지소조(芒知所措), 초상집이 발칵 뒤집혔다. 물이 나는 구덩이에 어떻게 묘를 쓸수 있겠는가? 부랴부랴 다른 곳에 다시 묘자리를 잡아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장례를 치른지 얼마후에 장녀였던 기씨 부인은 조심스럽게 남동생을 불렀다. "아무래도 윤서방 묘자리가 너무 허술해서 마음에 걸리는구나. 어차피 물이나서 못쓰는 묘자리라니 윤서방 묘를 그리 이장 하면 안되겠니?"
남동생은 펄쩍 뛰었다. "아니 윤가네두 선산이 있는데 왜 처가집 산으로 옵니까? 말두 안돼요"
그러나 청상의 누님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있던 남동생은 기씨부인의 간절한 소원을 끝까지 마다 할수가 없었다. 남동생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씨부인은 당장 남편의 묘를 이장 했고 얼마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오늘날 1만4천여 종인들을 결집시킨 판관공파(判官公派) 파조(派祖)인 윤은(尹訔)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기씨부인의 기지로 친정 아버지의 묘자리를 뺏은 덕분에 애당초 뱃속에 들은게 딸이었는데 명당의 기운으로 아들이 되었고 그 자손들의 영귀가 대대로 이어져 왔다고 전한다. 지금도 윤지득과 기씨 부인의 묘는 행주기씨의 선산인 성사동에 자리 잡고 있다..
<남원윤씨 판관공파 자료집에서 인용>
▼ 봉사공 윤지득(奉事公 尹之得) 선생 묘 전경
▼ 윤지득선생 묘역은 워낙 넓어 사진 한장으로 잡기 힘들다..
▼ 좌측과 우측으로 나눠 찍었다.
▼ 윤지득선생과 부인 행주기씨의 쌍분..
▼ 윤지득선생과 배위의 구 묘표...
▼ 윤지득선생 신 묘비..
▼ 윤지득선생 묘에는 묘비만 세개가 있다...
▼ 윤지득선생 묘 석물...
▼ 윤지득선생 묘 후경.. 풍수적으로 좋은 곳이란 평이다.. 맥은 양맥으로 퍼져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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