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경기 고양]사도세자 장인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 30. 10:00

    사도세자 장인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

     

    홍봉한 묘는 찾기도 쉽고 길 옆 과수원에 있어서 많이 가는 묘인데 기회가 닿지않아 미루다가 고양시 묘지답사 때

    찾아갔다. 아래 인물정보에서도 보듯이 한사람의 이력이 이렇게 길게 나오기도 드문데 영의정을 두번씩이나 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사람답게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묘소는 그 화려함이나 한시대를 풍미한 사람의 묘소답지않게 매우 초라할 정도로 간소하다. 단지 상석과 망주석

    그리고 근자에 세운 묘비가 전부다. 역사는 부정적 요소가 더 부각이 되는데 홍봉한은 영조를 도와 문예부흥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문화재는 아니어도 오히려 인물에 대한 안내판이라도 세워야 할 것 같다.

    홍봉한(洪鳳漢)
    1713년(숙종 39)∼1778년(정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홍중기(洪重箕)의 손자로, 홍현보(洪鉉輔)의 아들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惠慶宮洪氏)으로 뽑혔다.
    이듬해 세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계속 승진하여 다음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이듬해 비변사 당상이 되어 청인(淸人)들이 애양책문(靉陽栅門)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진절목 臨津節目〉을 찬진하였다.
    1755년 구관당상(句管堂上)‧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世孫師)가 되었다.
    1761년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뒤를 이어 우의정에 발탁되고, 그해에 좌의정을 거쳐 판돈령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한때 세자문제로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좌의정으로 복직된 후,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당쟁의 폐해를 시정하고 인재를 발탁할 것 등의 시무6조(時務六條)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고, 백골징포와 환곡작폐의 엄금, 은결(隱結)의 재조사 등을 단행하게 하여 국고를 채우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도록 하였다.
    1768년 재차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에는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그곳에 대한 영토의식을 높였다.
    1771년 영중추부사로 있던 중, 반대세력의 활동에 의하여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恩信君) 진(禛)‧은언군(恩彦君) 인(䄄)의 관작이 삭탈되고 나아가 세손(世孫: 뒤의 정조)까지 그 권위가 위협당하게 되었을 때 이를 막다가 삭직되고 청주에 부처되었으나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풀려나온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세손(정조)의 외할아버지라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영조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의 친정 인물인 김구주(金龜柱) 세력과 권력을 다투어, 영조대 중반 이후 김구주 중심의 남당(南黨)에 대립하였던 북당(北黨)의 중심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노론‧소론 대립의 여진 속에서 1762년 영조의 명령으로 세자가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때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하여 후일 정적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세자에 대한 처분을 뉘우치자, 그 사건을 초래하게 한 김구주 일파를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은 〈수의편 垂義篇〉을 찬술하여 반대파를 배격하는 구실로 이용하였다.
    정조 연간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시비가 정파대립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 그를 공격하는가 또는 두둔하는가의 여부가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를 구분하는 한 기준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영조를 도와 조선 후기 문화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국정 운영에 대한 주장을 정조가 친히 편찬한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가 있으며, 그밖에 《정사휘감(正史彙鑑)》‧《익익재만록》 등이 있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산17-2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문봉동 산17-2(보호수 지나 과수원 안쪽)
      풍산홍씨


     

     

     

     

     

     

     

     

     

     

    홍봉한(洪鳳漢) 묘(墓)

      벽제읍(碧蹄邑) 문봉리(文峯里)에 위치하며 배(配) 증부부인(贈府夫人) 한씨이씨(韓山李氏)의 묘(墓)와 합폄(合 )하였다. 봉분(封墳) 앞 석물(石物)로는 상석(床石) 1기(基),  망주석(望柱石) 2기(基), 동물석(動物石) 2기(基)가 있으며 1974년 4월 29일에 건립(建立)된 오석(烏石)의 묘표(墓表)가 있다. 표문(表文)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지사봉조하(致仕奉朝賀) 증영조부원군(贈永曹府院君) 풍부홍공봉한지묘(豊府洪公鳳漢之墓)」라 새겨져있으며 묘표(墓表)의 크기는 폭 60cm,  두께 30cm, 높이 167cm이다.
      홍봉한(洪鳳漢)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숙종(肅宗) 39년(1713)에  출생하여 정조(正祖) 2년(1778)에 사망하였다. 자(字)는 익여(翼汝), 호(號)는 익익재(翼翼齋)이다. 본관(本貫)은 풍산( 山)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며 현보(玄輔)의 아들이다. 영조(英祖)] 11년(1735)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을 거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를 지냈다. 영조(英祖) 19년(1743)딸이 세자빈(世子嬪)(惠慶宮 洪氏,  追贈敬懿王后)으로 간택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이 되었다.

    영조(英祖) 21년(1745)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특진(特進)되고 4년 후, 영조(英祖)25년 세자(世子)가 대리청정(代理廳政)케 되면서  누진(累進)하여 다음해 어영대장(禦營大將)이  되고, 이어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연접도감제조(延接都監提調)를 지내고,  영조(英祖) 28년(1752) 동지경정사(同知經 事)가 되었다.  이때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으로『임진절목(臨津節目)』을 지어 바쳤으며, 영조(英祖) 31년(1775)에는 구관당상(句管堂上)과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승진하고, 세손사(世孫師)를 겸하였다. 영조(英祖) 37년(1761) 세자(世子)가 왕도 모르게  관서지방(關西地方)을 유람한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인책당한 이천보(李千輔)와 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므로써 대신 그가 우의정(右議政)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左議政)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그러던 중 이듬해 5월 나경언(羅景言)은 이러한 세자의 비행 10여개 조목을 들어 임금께 상소하여 영조는 곧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하고 친히 세자를 뒤주속에 가두어 굶게하였다. 이러한 세태를 관망한 그는  세자가 부왕의 미움을 사서 대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방관적인 태도로 나가 세자의 아사(餓死)를 묵인하고 뒤주에 갇히던 날, 한강에 나가 여러 대신들과 선유(船遊)를  즐겼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사사건(餓死事件)을 뉘우치고 시호(諡號)를 내리자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사도세자의 죽음을 초래케 한 김구계(金龜桂) 일당을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수의편(垂義篇)』을 찬술하여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어 반대파인 벽파(僻派) 제거의 구실을 이용하였다. 영조 39년(1763) 주청사(奏請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오고 그후 영조의 탕평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했으며, 특히 당쟁(黨爭)의 폐해·인재(人材)의 발탁등 시무(時務)6조(條)를 올려 당면정책을 건의시행케 하고 당시 커다란 민폐(民弊)를 낳았던 환곡(還穀)의 작폐(作弊)의 엄금 백골징포(白骨徵布)와  은결(隱結)의 재조사등을 재조사등을 단행케 하여 국고의 충실과 백성의 부담을 절감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조 47년(1771) 벽파의 책동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두아들이 관작을  삭탈당하고 세손(世孫)(正祖)까지 해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막다가 삭직(削職)되어  청주(淸州)로 부처(付處)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홍국영(洪國榮)의 기민한 수습으로 시파(時派)가 승리하게 되어  풀려나와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조선후기 문화발전에 많은 업적을 이룩했으며 시호(諡號)는 익정(翼靖)이다. 저서(著書)로는 『정사휘감(正史彙鑑)』이 있으며 『익익재만록(翼翼齋漫錄)』을 편(編)하고, 뛰어난  글씨로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을 남기고 있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역..

    ▼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역 앞쪽 마을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보호수...

     

    ▼ 수령 약200년 느티나무...

    ▼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는 과수원 안쪽에 있다.. 한 가운데 묘비 이수부분이 보인다...

    ▼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비....

    ▼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 석물

     

    ▼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 전경...

    ▼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 측면..

    ▼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 후경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