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고양]고양팔현 민순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1. 27. 10:00
민순선생 묘
고양팔현의 한사람인 민순선생의 묘를 찾기위해 도상으로 무진장 노력을 했는데 제대로 찾지못해 고양시 문화재 관련단체에 문의를 여러차례하여 겨우겨우 알아내 찾게 되었다. 고양시문화관광사이트에 남향으로 표기되어있어 더욱더힘들었다. 현장에 가보면 오히려 쉽게 찾는데 위치파악이 안되어 힘들었던 묘소다.묘역에 가면 왜 이 묘소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는지 갸우뚱 해진다. 그만큼 별로 볼 품이 없는 묘소다. 역사적인 기록이나주인공의 인품도 문화재 지정에 충분히 반영이 되니 묘소만 보고 판단할 일은 아니다. 오후 늦은 시각이었는데 햇살이 비춰눈부실 정도였다.
민순(閔純)
1519년(중종 14)∼1591년(선조 2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습정(習靜). 장사랑(將仕郞) 민학수(閔鶴壽)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신광한(申光漢)의 문하에서, 장성한 뒤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경덕으로부터 주정(主靜)의 설(說)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자기가 처하던 재(齋)의 이름을 ‘습정재(習靜齋)’이라 하였다 한다.
1568년(선조 1) 효행으로 천거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학행이 알려져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되고, 이어 공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토산현감(兎山縣監)으로 나갔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고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심하였다.
1575년 사헌부지평으로 다시 조정에 들었으나, 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을 당하여 예관(禮官)들이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상복을 정하자, 그는 송나라 효종(孝宗)의 백모3년(白帽三年)의 고제(古制)로 고쳐 준용할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한 것이 물의를 빚어, 그해 6월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초야에 묻혔다.
그뒤 용강현령(龍岡縣令)‧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내고 사헌부장령을 거쳐 수안군수(遂安郡守)에 이르렀으나, 모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는 하였다.
그뒤로는 연안(延安)‧성천(成川)의 부사(府使)‧공조정랑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힘을 기울였다.홍가신(洪可臣)‧한백겸(韓百謙)‧홍치상(洪致祥)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행촌집》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문화재지정 고양시 향토유적 제8호 문화재명칭 민순선생묘 및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현천동 산19(169-1 대지 윗쪽 서향묘) 관리자(연락처) 여흥민씨 묘는 항공대 뒤편인 현천동 거무내 마을에 남향-서향의 잘못 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淑人 平壤 趙氏와 淑人 全州 李氏가 함께 3기의 봉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묘갈, 상석, 향로석 및 망주석 1쌍이 있다. 민순의 봉분 앞에는 ‘通訓大夫通禮院 右通禮 習靜先生 閔公之墓’라 쓰여진 묘비가 있다. 묘소 50m아래에 있는 묘갈명에는 ‘習靜先生 閔公墓碣銘’이라는 전자만 확인될 뿐 비문은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이 심하다. 민순(1519~1591)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文峰書院에 제향된 高陽八賢의 한 사람이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민순선생 묘역..
▼ 민순선생 묘역 안내판
▼ 민순선생 묘비
▼ 민순선생 묘역 새로 세운 묘비..
▼ 민순선생 묘역 측면...
▼ 민순선생 묘역 석물... 망주석이 깊게 박혀있다..
▼ 민순선생 묘역 후경.. 역광을 피하느라.. 화면이 어둡다..
▼ 해넘이 직전...
'답사는 즐거워 > 묘지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기 고양]사도세자 장인 영풍부원군 홍봉한 묘 (0) 2012.01.30 [경기 고양]완산부원군 이천우선생묘 및 신도비 (0) 2012.01.28 [경기 고양]회옹공 이숙균 묘소 (0) 2012.01.26 [경기 고양]통계공 강회중 묘 (0) 2012.01.25 [경기 남양주]음관으로 정1품이된 이민보 묘 (0) 2012.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