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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한계미선생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2. 7. 10:00

    한계미(韓繼美)선생 묘 및 신도비

     

    한계미선생 묘는 관산동에 있어 쉽게 찾을 것 같은데 문제는 묘역이 잠겨있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답사하기로 했는데 문중 재실에 부탁을 해야할 것 같아 오전 답사일정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찾아갔다. 조금 이른시각이라 부탁하기도 뭐하고 해서 직접 묘지로 갔는데 다행스럽게도 묘지로 접근은 가능했다. 문중에게는 미안하지만 답사객의 마음은 급한지라 절차를 다 거치지 못하고 묘역만 둘러보고 오는 수가 가끔 있다.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함을 전한다. 한계미선생 묘역은 워낙 넓어서 미쳐 다 돌아보지 못하고 보이는 묘만 답사를 했다. 다음에 정식으로 문중의 허락을 얻어전체 묘역을 답사해 보고 싶다.

     

    한계미(韓繼美)

     

    1421년(세종 3)∼1471년(성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보(公甫).
    개국공신 한상경(韓尙敬)의 손자로, 함길도관찰출척사 한혜(韓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다. 그의 처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로, 윤번(尹璠)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18세의 나이에 음보로 충의위사용(忠義衛司勇)이 되고, 부사직으로 감찰을 역임하였으며, 나주판관을 거쳐 1452년(문종 2) 형조도관좌랑(刑曹都官佐郞)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그를 따라갔다가 돌아온 뒤 그 공로로 군자판관이 되었으며, 1455년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제수되었다. 이해 세조가 즉위하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절충장군 행호분시위사대호군지사간원사(折衝將軍行虎賁侍衛司大護軍知司諫院事)로 옮겨지고, 이해 6월 동부승지로 승진하였으며, 7월에 우부승지로, 10월에 좌부승지로 나갔다.
    1457년 우승지로 있을 때 세자의 질병을 열심히 간호하여 왕의 칭찬을 받았다.
    1458년 9월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호조참판이 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 졌다.
    1461년 하삼도(下三道)의 부호(富戶)를 추쇄(推刷)하여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에 이주시킬 때, 안집도순찰사(安集都巡察使)가 되어 제방을 쌓고 진전(陳田)을 개간하는 등 북방개척에 큰 공적을 세웠다.
    1463년 자헌대부(資憲大夫)로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왕은 군액 부족을 우려하여 3도의 군적(軍籍)을 정비하도록 하였는데, 호구(戶口)의 증감을 정확하게 조사하여 왕의 뜻에 부합하였다.
    1465년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겸사복장(兼司僕將)이 되었다가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옮겼다.
    1467년 숭정대부(崇政大夫)로서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이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의 정병(精兵)을 이끌고 가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숭록대부 우찬성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좌찬성으로 옮기고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470년 보국숭록대부에 승품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2등에 책록되고, 이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1호

    문화재명칭

    한계미(韓繼美)선생 묘 및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7-5

    관리자(연락처)

    청주한씨

     

    한계미(韓繼美)

     

    묘는 관산동 시묘골 마을의 청주한씨묘역에 위치하며 왼쪽에 파평윤씨가 합장되어있는 단묘이다.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묘비,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는데 상석과 망주석, 장명등은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묘소 주위에는 후대에 두른 화강암 재질의 호석이 둘러져있으며 봉분의 둘레는 총 28m이고 높이가 2m이다. 우측에는 1972년에 건립한 묘비가 있고 봉분 앞 중앙에는 당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백대리석 묘비가 세워져있다. 한계미선생의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종2년(1471) 12월에 세운 것으로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다. 크기는 총 높이 230㎝, 너비 66㎝, 두께 21㎝이다. 비각은 최근 새로 지었다. 한계미(1421~147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公甫, 본관은 淸州로서 관찰사 惠의 아들이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한계미선생 묘역과 신도비각

     

    ▼ 한계미선생 묘역 앞에 있는 연지..

     

    ▼ 한계미선생 묘 및 신도비 안내판..

     

    ▼ 한계미선생 신도비

     

    ▼ 한계미선생  묘역 전경

     

    ▼ 한계미선생 묘역 좌측..

     

    ▼ 한계미선생 묘역 우측...

     

    ▼ 한계미선생 묘 전경

     

    ▼ 한계미선생 묘비...

     

    ▼ 한계미선생 묘표...

     

    ▼ 한계미선생 묘 석물..

     

     

     

    ▼ 한계미선생 묘비 측면과 후면

     

     

    ▼ 한계미선생 묘 옆에 있는 작은 묘.. 무슨 사연이 있을것 같은데... 찾아보지 못했다..

     

    ▼ 한계미선생 묘 입수처..

     

    ▼ 한계미선생 묘 후경

     

     

    ▼ 한계미선생의 아들 한의선생 신도비

     

    ▼ 한의선생 신도비 측면, 후면

     

    ▼ 한의선생 묘역

     

    ▼ 한의선생 묘표

     

    ▼ 한의선생 묘 석물...

     

     

    ▼ 한의선생 묘에서 묘역 입구를 바라본 정경.. 앞쪽에 새로 세운 신도비가 보인다..

     

    ▼ 한의선생 묘 후경

     

    ▼ 한의선생 묘에서 바라본 북한산...

     

     

    ▼ 한계미의 증손, 한형원의 아들 한규 묘

     

    ▼ 한형원의 아들 한규 묘표

     

    ▼ 한규 묘 석물

     

     

    ▼ 한규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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