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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남양주]원주변씨 시조 대은변안렬 묘역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2. 11. 10:00

    원주변씨 시조 대은변안열 묘역

     

    남양주 묘지답사를 하면서 원주변씨 시조 묘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답사 동선이 맞지않아 몇차례 기회를 

    놓쳤는데 마침 기회를 얻어 변안열 선생 묘 부근의 원주변씨 묘역을 자세히 답사를 하였다. 부근에는 공주 

    묘도 있었고 후손들 묘도 있었다. 차차 답사 결과를 올리도록 하겠다.

    변안열(邊安烈)
    1334년(충숙왕 복위 3)∼1390년(공양왕 2). 고려말의 무신.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 본래 심양(瀋陽)사람이다.
    원나라 말기에 병란으로 당시 심양에 가 있던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原州)를 본관으로 받았다.
    1361년(공민왕 10)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패주시켜, 이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개성을 수복하고 일등공신이 되었다.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최영(崔瑩)과 더불어 제주를 정벌한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받은 뒤 양광 전라도도지휘사 겸 조전원수(楊廣全羅道都指揮使兼助戰元帥)로서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어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의 부장으로 운봉(雲峰)과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개선한 뒤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그 세력이 임견미(林堅味)‧이인임(李仁任) 등과 겨루게 되었다. 단양과 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뒤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뒤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1389년(창왕 1)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이성계의 제지와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일이 발각되어 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에 연루, 한양(漢陽)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사형되었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 〈언락 言樂〉에 전해오는 〈불굴가 不屈歌〉가 그의 시가로 밝혀져 그의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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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6호
       원주변씨 시조 대은변안열 묘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704-1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704-1
       원주변씨

     

     

     

     

     

     

     

     

      

     

    고려말의 무신 변안렬(邊安烈: 1334~1390)묘역의 묘와 묘표이다.변안렬은 호는 대은(大隱), 본관은 원주이며 심양후 양(諒)의 아들로 원래 황해도 황주(黃州)를 본관으로 하고 있었는데 조부 순이 1268년 원나라에 들어가 심양후(瀋陽侯)에 봉해졌으며 아버지도 이를 이어 받았다.  

    그는 중국 심양에서 태어나 1351년 원의 무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형부상서에 올랐다. 1352년 노국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왔다. 이에 공민왕은 추밀원사 원의의 딸과 혼인케 하였고 본관으로 하사받아 원주 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1361(공민왕10)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물리쳐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개성을 지켜 일등공신이 되었다.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최영과 더불어 제주를 정벌한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우왕 때 문하찬성사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도순찰사 이성계와 함께 운봉과 황산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정방제조가 되었다. 단양과 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뒤 원천부원군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그러나 1389년(창왕1)이성계의 제거와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일이 발각되어 한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묘역은 진건읍 용정리에 진한부인 원주 원씨와 쌍분으로 서향하고 있다. 묘역은 새로 조성되어 잘 정비되어 있는데, 호석, 묘비, 상석, 향로석, 양석(羊石), 장명등을 새로 세웠다. 옛 것은 망주석만 남아 있는데 마모가 심하다.

    묘역 아래 있는 모표는 1571년(선조4)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6대 외손 황해도 관찰사 박승임(朴承任)이 짓고, 7대 외손 여성군 송인이 썼다.   특히 모표의 이수에는 전통적 믿음과 관련되는 운문일월도(雲紋日月圖)가 새겨져 있는데 앞면에는 달 속에 토끼가 방아찧는 모습을, 뒷면의 태양 안에는 삼족오(三足烏)가 새겨져 있다.

    <남양주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원주변씨 시조 대은변안열 묘역 안내도. 

    ▼ 원주변씨 시조 대은변안열 신도비

     

    ▼ 원주변씨 시조 대은변안열 묘역 안내판...

    ▼ 대은변안열 묘역 홍살문...

    ▼ 대은변안열 시비...

    ▼ 대은변안열 묘역.. 연지, 비각, 묘역이 보인다.

    ▼ 대은변안열 묘 원경...

    ▼ 대은변안열 구 신도비...

    ▼ 대은변안열 신도비 이수에 전설속 토끼가 방아찧는 모습이 보인다..

    ▼ 대은변안열 묘 근경

    ▼ 대은변안열 묘비...

    ▼ 대은변안열 묘비.. 신 묘비보다 조금 이전에 세운것 같다..

    ▼ 대은변안열 구 묘표

    ▼ 대은변안열 묘 석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요즘 세우는 문인석은 조각이 엉성하다..

    ▼ 그래도 이곳은 문인석이 조금 낫다... 중국산 문인석은 정말 엉망이다..

    ▼ 대은변안열 묘 측경...

    ▼ 대은변안열 묘 입수처..

    ▼ 대은변안열 묘 후경..국이 잘 짜여져 있지만 세는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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