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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변이(변안열의 자)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2. 13. 10:00
변이(변안열의 자) 묘
변안열의 묘를 지나 여러기의 묘가 보였지만 시간관계상 지나치고 변이 묘를 찾았다. 안쪽에 깊이 위치해 있었다.
묘역 입구에는 덕천군주 묘가 있고 그 주위에도 원주변씨 후손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산 건너편에도 커다란 묘가 보이고 시간은 바빠 몇몇 묘는 그냥 지나쳤다. 다음에 다시한번 찾아가야 할 곳이다.
변이(邊㶊)
1360년(공민왕 9)∼1439년(세종 21).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이지(㶊之).
조부는 증판삼사사(曾判三司事) 변량(邊諒)이고, 부친은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변안렬(邊安烈)이다.
젊어서부터 풍채가 우뚝하고 기절이 높아 경제(經濟)의 뜻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 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거두어 세상을 진취 할 뜻을 없었다. 태조(太祖)가 등극하여 여러 번 벼슬을 내렸는데 변이는 한사코 이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해 주지 않았다.
1411년(태종 11)에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고 원종공신(元從功臣)에 1등으로 책록되어 전지(田地) 30결과 노비 30구(口)를 하사 받는 등의 총애를 받았다. 태종이 완산(完山)에 거동할 적에 변이는 당시 남원부사(南原府使)의 직임을 맡아 관찰사 조원(趙源), 완산부윤 신극공(辛克恭)과 더불어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왕을 알현했다. 그 뒤 원주목사(原州牧使), 강계부윤(江界府尹)을 역임하였는데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자신을 규율하였으므로 다스린 곳마다 구비(口碑)가 전해졌다.
1420년(세종 2)에 전라도병마수군도절제사(兵馬水軍都節制使)로 임명되었고, 1422년에 충청도수군도안무처치사(忠淸道水軍都安撫處置使)로 전보되었다. 내직으로 들어가 중군총제(中軍摠制)가 되었으며 하정부사(賀正副使)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진하사(進賀使)인 권희달(權希達)의 죄상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첩을 회수 당했으며 부처하기를 자원하였다. 이듬해에 직첩을 되돌려 받아 좌군총제(左軍摠制)로 전보되었다.
그는 일찍이 친지들과 감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의 마음을 보라!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윽이 깊은 산속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나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이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1439년 12월 13일 세상을 떠났고, 묘는 남양주(南楊州) 진건면(眞乾面) 용정리에 있다.
자식은 7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인 변차희(邊次熹)는 첨지중추(僉知中樞), 변상조(邊尙朝)는 남부령(南部令), 변상근(邊尙覲)은 영중추호군, 변상회(邊尙會)는 예조참판(禮曹參判), 변상동(邊尙同)은 감찰(監察), 변상빙(邊尙聘)은 간성군수(杆城郡守), 변상복(邊尙服)은 덕천군주(德川郡主)에게 장가들어 원천위(原川尉)에 봉해졌다. 딸은 공신 정유길, 개성유수 이점, 좌찬성 이승손에게 출가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변이(변안열의 자) 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산200번지 원주변씨 ▼ 원주변씨 시조 변안열의 아들 변이 구 묘표....
▼ 원주변씨 시조 변안열의 아들 변이 묘비....
▼ 변이 묘비 측면..
▼ 변이 묘 석물
▼ 변이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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