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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양평]병인양요 승리로 이끈 유장(儒將) 양헌수(梁憲洙)장군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2. 16. 10:00
    유장(儒將) 양헌수(梁憲洙)장군 묘 

    양헌수장군 묘를 찾기위해 벌써 세번째 발걸음이다. 첫번째는 다음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았더니 엉뚱한 민묘가 있어서 그냥 돌아왔고.. 두번째는 그곳 백동저수지 뒷편에 그럴듯한 묘가 있어 그게 양헌수장군 묘인줄 알고 올랐다가 아니어서 다시 되돌아오고.. 세번째 방문에 지도를 샅샅히 훑어서 찾아간 곳이었는데 이번에야 제대로 찾았다.
    앞에 다녀오신 분들이 지도에 제대로 표기만 해놨어도 이런 불편함은 없었을텐데... 다음지도에 제가 계속해서 오류를 지적하고 수정하고 있지만 매번 볼때마다 제대로 위치가 표시되지않아 헛걸음 치기 십상이다. 차후에 묘지답사를 하시는 분들은 다음이나 네이버지도에 묘지 위치표시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오류수정요청을 하여 수정 부탁드립니다.

     

    양헌수(梁憲洙)

    1816년(순조 16)∼1888년(고종 25).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부사정 양종임(梁鍾任)의 아들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에는 참상관(參上官)에 올랐다.1865년(고종 2) 제주목사로서 전판관 백기호(白基虎)의 탐학을 징치하도록 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고, 이해 가을 극심한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 진휼을 요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한해를 더 잉임(仍任)하였다.
    1866년 어영청의 천총(千摠)으로 준천사(濬川司)의 도청(都廳)을 겸하다가 병인양요를 당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李容熙)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別軍官) 이현규(李鉉奎)와 함께 17명의 초관(哨官)과 경초군(京哨軍) 121명, 표하군(標下軍) 38명, 포수 367명을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의 손돌(孫乭)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지키던 중, 10월 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Rose)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Ollibier)의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내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병사로 재직중이던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설한 별위사제도(別衛士制度)의 격려방안으로 매년 도시(都試)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면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을 더 연임하였고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시하기도 하였다.
    1873년 어영대장에 임명되었고, 1874년 좌변포도대장을 지냈다.1875년 2월 형조판서가 주어졌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던듯하며 8일 뒤 금위대장이 되었다.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집권한 대원군은 민비(閔妃)의 상을 치르는 한편, 척족세력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때 조영하(趙寧夏)‧김병시(金炳始)‧김기석(金箕錫)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다.1884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 독련사(督鍊使)가 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양평군 향토유적 제13호
    문화재명칭 유장(儒將) 양헌수(梁憲洙) 묘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 산59-19(네비:덕수리 1번지)
    관리자(연락처) 남원양씨

     

    양헌수(梁憲洙, 1816~1888)는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자는 경보(敬甫), 본관은 남원으로 양종임(梁鐘任)의 아들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헌종 14년(184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에는 참상관에 올랐다. 고종 2년(1865)에 제주목사로 부임되어 전판관 백기호(白基虎)의 탐학을 징계하도록 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고, 선정을 베풀어 임기를 일년 더 연장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는 순무천총(巡撫千摠)으로 정족산성에 침입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한 뒤 한성부 좌윤에 특진되었다. 이후 어영대장, 금위대장, 포도대장에 임명되었고, 고종 13년(1876)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이용희 등과 함께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이후 지삼군부사, 공조판서를 거쳐 1887년 독련사가 되었다. 1888년 세상을 떠났는데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의 장례를 치를 적에 강화도민들이 제문(祭文)을 가지고 와 부의하며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양헌수는 보수적인 척화론자로, 문무를 겸비한 유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저서로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묘는 정부인 고성이씨(貞夫人 固城李氏)와 합장묘로 묘비 이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묘비는(높이 131㎝, 폭 51㎝, 두께 20㎝) 아들 양주겸(梁柱謙)이 1934년 5월에 건립한 것으로 앞면에는 『正憲大夫 刑曹判書禁衛大將兼義禁府三軍府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經筵特進官 贈諡忠莊 南原梁公諱憲洙之墓 貞夫人固城李氏左』라고 새겨져 있다. 신도비는 용문면 광탄리 택승정 옆에 양평군과 양씨 문중에 의해 1996년 건립해 놓았다. 신도비문은 1889년에 한장석(韓章錫)이 지은 것으로 제주도 목사시 선정내용과 병인양요 때의 활약상과 함께 몇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있다. 한편 강화도에는 고종 10년(1873)에 강화도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그의 전승기념비인 『巡撫千總 梁公 憲洙 勝戰碑』가 남아 있다..<양평문화원에서 인용>

     

    ▼ 유장(儒將) 양헌수(梁憲洙) 묘 안내판

     

    ▼ 양헌수(梁憲洙) 묘 전경

     

    ▼ 양헌수(梁憲洙)장군 승전비가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 안에 있다.

     

    ▼ 양헌수(梁憲洙)장군 묘

     

    ▼ 양헌수(梁憲洙)  묘표

     

    ▼ 양헌수(梁憲洙)  묘 석물...  문인석도 아니고.. 최근에 무인석을 세웠는데...  영 조잡스럽다..

     

     

    ▼ 양헌수(梁憲洙)  묘 입수처에서 바라본 모습...

     

    ▼ 양헌수(梁憲洙)  묘 후경

     

    ▼ 양헌수(梁憲洙)  묘 백호쪽...

     

    ▼ 양헌수(梁憲洙)  묘 청룡쪽...

     

    ▼ 양헌수(梁憲洙) 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백동낚시터를 찾아 그 뒤를 돌아들어가야 한다.

     

    ▼ 낚시터 뒤에 보이는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면 영화산 무량사 절이 나온다.

     

    ▼ 무량사 절 주차장에 주차해놓고 스님께 여쭤보는게 제일 빠른 방법이다.  절에서 한20여분을 오르면 양헌수장군 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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