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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경종 국구 심호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2. 17. 10:00
경종 국구 심호 묘
양평 단월면 묘지를 보고 돌아나오면서 한강을 건너니 한창 말 많은 4대강사업의 이포대교가 눈에 보인다. 사진한장
찍고 심호선생 묘를 찾아 갔다. 묘역은 산7번지로 워낙 커서 인근의 주택을 정해 네비게이션을 찍었는데도 엉뚱한 곳으로
안내한다. 능선반대쪽으로 차를 세우고 밭을 가로질러 올랐는데 뭔가 이상하다. 먼저 다녀오신 분들의 사진과 너무 다르
다. 찬찬히 살펴보니 그동안 묘지에 대 변화가 일었던 모양이다.
능선 우측에 있었던 심희세, 심권, 심호 묘가 능선으로 모두 이장해 있었고 신도비도 능선쪽으로 모두 이전해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만 한쪽으로 모으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조금 허전하지만 그래도 묘지답사를 최근에 한 사람으로서 상황을 알릴 겸 해서 올린다.
심호(沈浩)
미상∼1704년(숙종 30). 본관은 청송(靑松).
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심봉서(沈鳳瑞)이고, 조부는 부응교(副應敎) 심권(沈權)이다.
1696년(숙종 22)에 따님이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자, 영소전참봉(永昭殿參奉)에 배수되었다. 세자빈은 고(故)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로우며 예쁘고 온순하여 11세에 간택(揀擇)에 뽑혀 책례(冊禮)를 행하였었다. 이후 양궁(兩宮)을 받들어 섬기는 데에는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였으며, 동궁(東宮)을 섬기는 데에는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서 곡진하게 예절을 갖추었다.
1703년(숙종 29)에 사직령(社稷令)이 되었으나, 어리석고 둔하며 무식한데 권세만 믿고 위세를 부렸다. 금오랑(金吾郞)으로 있을 때에는 하리(下吏)를 매질하여 거의 하루도 거른 날이 없었으므로, 온 부내(府內)가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다. 길을 가며 사람을 물리칠 때 즉각 돌아서서 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바로 잡아가두고 하인을 시켜 뇌물까지 요구하여 욕심을 채우니, 원망과 비방이 항간에 끓어올랐다. 전조(銓曹)에서 사직서(社稷署)는 한직(閑職)이므로 폐단이 없을 것을 바라고 옮겨 임명하니, 그가 매우 분개하고 원망하였다고 전한다.
1704년(숙종 30) 2월에 첨정(僉正)으로서 사망하니, 왕세자(王世子)가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임금이 상장(喪葬)에 드는 물품을 넉넉히 지급하게 하였다. 이후 4월에는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었고, 1720(경종 1)에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경종 국구 심호 묘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산7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235번지 주택앞에 주차 후 밭 가로질러 이동 청송심씨
심권(沈權)
1643년(인조 21)∼1697년(숙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성가(聖可).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심희세(沈熙世)이며, 어머니는 현감 박안승(朴安昇)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되었다가 검열을 거쳐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서인인 조태구(趙泰耉)‧이징명(李徵明)‧조형기(趙亨期) 등과 함께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되자 풀려나왔다.
그뒤 부수찬‧정언‧이조좌랑‧부교리‧헌납‧지제교‧사인‧부응교‧보덕‧집의 등을 거쳐 1696년 승지‧병조참지‧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97년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다가 죽었다. 그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고, 고사(古史)에도 밝았다.심희세(沈熙世)
1601년(선조 34)~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덕휘(德輝)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증조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심강(沈鋼)이고, 조부는 부사 심예겸(沈禮謙)이며, 부친은 영의정 심열(沈悅)이다. 생부는 선조대 동서붕당으로 유명한 심의겸(沈義謙)의 아들인 심엄(沈㤿)이다.
1639년(인조 17) 식년시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으며, 1642년(인조 20)에는 지제교에 선출되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사간원 헌납으로 승직하였으며, 한 달 뒤에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다. 다시 세 달 뒤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임명되었다. 1644년(인조 22)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제수되었는데, 곧 이조좌랑으로 재임용되었다.
이때 신면(申冕)의 뜻에 부합하여 성초객(成楚客)을 임용한 것을 두고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며, 결국 유형을 받았다. 1645년 부친인 우의정 심열 아들의 중병을 이유로 용서를 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심희세(沈熙世)는 유배를 떠나기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추후 이조판서‧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묘 와 신도비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위치한다.심열(沈悅)
1569년(선조 2)∼1646년(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아버지는 부사 심예겸(沈禮謙)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첨지중추부사 정숙(鄭潚)의 딸이다. 심충겸(沈忠謙)에게 입양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문관 검열에 기용되었다. 뒤에 성균관전적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경기도‧황해도‧경상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1623년 호조판서로 승진하였으며, 1638년(인조 16) 염철사(鹽鐵使)가 되어 중국 심양(瀋陽)에 가서 물물교환을 하였고, 그뒤 강화유수‧판중추부사‧우상‧영상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탁지(度支)에 대한 뛰어난 경륜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는데, 특히 시는 심오전아(深奧典雅)하면서 호상활달(豪爽豁達)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며, 저서로는 《남파상국집》 6권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경종 국구 심호 묘역... 청송심씨 심예겸, 심열, 심희세, 심권 등의 묘가 함께 있다..
▼ 경종 국구 심호 묘역의 신도비
▼ 청송심씨 신도비도 우측에서 이곳으로 이동했다.. 왼쪽부터 심호묘비, 심열신도비,심권신도비
▼ 경종 국구 심호 묘역
▼ 경종 국구 심호 묘 후경
▼ 얼마전까지 청송심씨 묘역 배치...<개미실사랑방에서 가져왔습니다>
우측에 보이는 심희세, 심권, 심호 묘를 좌측 능선에 있는 심예겸, 심열 묘 아래로 옮겨놨다.
▼ 경종 국구 심호, 심희세, 심권 묘 이장한 후의 모습...
▼ 경종 국구 심호 묘 이장한 후의 모습..
▼ 청송심씨 묘역 원경...
▼ 경종 국구 심호 묘가 있던 자리에서 바라본 남한강... 물길이 들어오지만 대하수다..
▼ 청송심씨 묘역 후경..
▼ 경종 국구 심호 묘 후경...
▼ 경종 국구 심호 묘 이장시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묘지명(청은부원군의 글자가 있었다)
▼ 경종 국구 심호 묘
▼ 경종 국구 심호 묘표
▼ 경종 국구 심호 묘 망주석... 망주석에 청은부원군심공지묘 라고 써있다.
▼ 경종 국구 심호 묘 곡장 기단석을 이곳으로 옮겨놨다...
▼ 옮기기 전의 심호 묘 ... 곡장 기단석이 보인다. <개미실사랑방에서 인용>
▼ 경종 국구 심호 묘역에서 답사하는 여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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