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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양평]조욱 선생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2. 20. 10:00

    조욱 선생 묘

     

    양평묘지 답사를 갔다가 시간이 늦어 해가 거의 넘어갈 즈음에 조욱선생 묘를 찾았다. 이미 두번 다녀온 

    곳이라 쉽게 찾았는데 처음가는 분은 산7번지로 찾으려 하면 좀 어렵다. 지도를 잘 살펴보고 찾아가시길...

    다음지도에 나와있는 조욱선생 묘 위치가 잘못되어 수정요청 했다. 아마 이 글이 나올때 쯤이면 수정이 

    되어있지 않을까?

    다음 지도에 나와있는 묘지 위치는 거의가 틀린 위치다. 다음지도만 보고 찾아갔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쉽다.

    인터넷에서 자세히 나와있는 지도를 참고해서 찾아가시길...

    조욱(趙昱)
    1498년(연산군 4)∼1557년(명종 1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보진재(葆眞齋). 아버지는 판관 조수함(趙守諴)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을 사사하면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기묘사화 때 두 스승에 계루되었으나 연소하다고 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뒤 형인 조성(趙晟)과 함께 삭령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는데,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정호(程顥)‧정이(程頤)형제에 비겨 칭송하였다. 뒤에 선원전(璿源殿)‧순릉(順陵)‧영릉(寧陵) 등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3년상을 마치고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학문이 알려져 용문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명종 때 성수침(成守琛)‧조식(曺植) 등과 함께 천거되어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가 제수되었고, 이듬해 장수현감에 이르렀다.
    시문과 서화에 능하였으며,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용문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문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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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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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연락처) 

       양평군 향토유적 제26호
       조욱 선생 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7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7
       평양조씨


     

     

     

     

     

     

     

     

     

    조욱(趙昱, 1498~1557)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ㆍ세심당(洗心堂)ㆍ우암(愚庵)ㆍ보진재(葆眞齋)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판관 조수성(趙守諴)의 아들로 중종 11년(1516)에 생원ㆍ진사 양시에 합격한 후 조광조(趙光祖)ㆍ김식(金湜)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두 스승과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화를 면하였다. 이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형인 조성(趙晟)과 함께 삭녕(朔寧)에 있는 옛 전장(田庄)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다. 잠시 선원전(璿源殿)과 순릉(順陵)․영릉(英陵)의 참봉(參奉)을 지냈으나 곧 사직하고 천하 명산을 유람하다가 48세 되던 해 지평(砥平)의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평양조씨가 지평에 입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명종 7년(1552) 성수침(成守琛)ㆍ조식(趙植)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섬시 주부(內贍寺 主簿)가 되었으며, 명종 10년 을묘왜변(乙卯倭變) 때는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을 잘 막아냈다. 그 후 사직하고 다시 지평 용문산으로 돌아와 예전에 살던 집을 세심당(洗心堂)이라 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서경덕(徐敬德)ㆍ이황(李滉)ㆍ김안국(金安國)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학문이 널리 알려져 『용문선생(龍門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호는 문강(文康)이고, 저서로는 정조 3년(1779)에 발간된 『용문집(龍文集)』이 있다. 영조 16년(1740)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헌종 9년(1843) 이조판서 겸 성균관제주로 추가 증직되었다.
    묘역에는 장대석의 호석이 돌려져 있으며, 묘 왼쪽에 묘갈이 위치해 있다. 중앙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동자석과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묘갈(높이 155㎝, 폭 58㎝, 두께 31㎝)은 조욱의 증손이 조문형(趙門衡, 1617~1700)이 부탁하여 묘비문을 조익(趙翼)이 짓고, 이건명(李健命)이 글씨를 썼으며, 이징하(李徵夏)가 전(篆)한 것인데, 김진상(金鎭商)의 추기(追記)를 덧붙여 영조 21년(1745)에 세워졌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형의 옥개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고 있으며, 비석의 상단에는 전자(篆字)로 『有明朝鮮國龍門趙先生墓碑銘幷序』라고 새겨져 있다.
    조욱의 묘에서 남쪽으로 1㎞ 떨어진 덕촌리 길가에 2000년에 세워진 조욱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1998년 최근덕(崔根德)이 짓고, 황재국(黃在國)이 썼다. 묘에서 남동쪽으로 1㎞정도 떨어진 덕촌리 서원말에 조욱을 제향한 운계서원이 위치해 있고, 남서쪽으로 700m정도 떨어진 곳에 세심정과 조욱이 살았었다고 하는 퇴촌마을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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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문화원에서 인용>

     

     

     

     

     

     

     

     

     

     

     

     

     

     

     

     

     

     

     

     






    ▼ 조욱 선생 묘에서 바라본 풍경

    ▼ 조욱 선생 묘 입구

    ▼ 조욱 선생 묘 오르는 계단... 이렇듯 앞쪽으로 계단을 내면 바람길이 되어 흉하다..

    ▼ 조욱 선생 묘 전경

     

     

     

    ▼ 조욱 선생 묘 안내판..

    ▼ 조욱 선생 묘비...

    ▼ 조욱 선생 묘 석물..

     

     

     

    ▼ 조욱 선생 묘 동자석...

     

    ▼ 조욱 선생 묘역에서 바라본 조안산..

    ▼ 조욱 선생 묘 입수처..

    ▼ 조욱 선생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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