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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성남]청주한씨 문정공 한계희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4. 5. 10:00

    청주한씨 문정공 한계희 묘

     

    청주한씨 한계희 묘는 2000년대 초에 풍수답사차 다녀온 곳이었는데 그 후로도 몇번 다녀온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막상 답사기를 올릴려고 보니까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검색을 할 수 없다. 용량이 커서 컴 하드에는 2년정도의 사진만 보관 하다보니 그 이전 사진들은 외장하드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어서 찾아내는 것도 큰 일이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다시 답사한다는 생각으로 요즘 지역별로 하나하나 다시 답사하고 있다. 다녀온 곳은 바로 답사기를 올려서 이전의 폐단을 줄여보려고 노력중이다.
    오늘부터 성남시에 있는 청주한씨 묘를 시리즈로 올려볼 생각이다. 율동공원 주위는 청주한씨 사패지이다. 이곳에 있는 묘와 한 두 기 흩어져 있는 묘들을 함께 올릴 예정이다.

     

    한계희(韓繼禧)

     

    1423년(세종 5)∼1482년(성종 1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순(子順).
    개국공신 한상경(韓尙敬)의 손자로, 함길도관찰출척사 한혜(韓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성달생(成達生)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었다가 곧 집현전 정자로 뽑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서 경연관(經筵官)을 상겸하고 부교리에 이르렀다.
    세조가 즉위한 뒤로 신임을 두터이 받아 1455년(세조 즉위) 세자우문학, 이듬해 좌필선‧집의, 1457년 예문관직제학‧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으로 문한의 직을 역임하고, 이어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을 겸하였다.
    이듬해 좌보덕‧병조지사(兵曹知事)‧참의, 1460년 우승지, 1467년 좌승지‧공조참판‧중추원부사, 1468년 이조참판으로서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고,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 146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67년 중추부사, 이듬해 세조가 병환이 심할 때 조약(調藥)의 임무를 맡았고, 죽기 전날에는 세조의 지시로 대보(大寶)와 곤면(袞冕)을 세자에게 전수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1469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를 제거한 공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翼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성종이 즉위하여서는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1478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집안은 조선 초기의 명문거족으로서 그의 벼슬길에 가문의 배경이 큰 힘이 되기도 하였지만, 세종 때 집현전 장서각(藏書閣)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박람강기(博覽强記)로 쌓은 학식이 큰 바탕이 되었다. 학식과 단정한 성품으로 주위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특히 서거정(徐居正)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4호

    문화재명칭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한계희,한사문,한사개)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 2-1(율동공원 내)

    관리자(연락처)

    청주한씨 문정공파 종회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한계희(1423∼1482)는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문정이며 우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기내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특히 세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최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고 1447년(성종 8) 의방유취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신도비는 개석이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이었던 화관석, 비신, 기대로 이루어졌고 화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화강편마암으로 화강암인 기대에 꽂아 세우게 되어 있다. 규모는 화관석이 폭72cm, 두께23cm, 높이52cm이고 비신이 61×18×152cm 기대가 115×59×44cm이며, 총고 48cm이다. 신도비문은 서거정(1420∼1488)이 찬하고 안침이 전과 글씨를 썼다. 건립년대는 1483년(성종 14)이다.

    한사문(1446∼150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공간이며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으며 신도비는 총고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앞.뒷면에는 각 4개와 2개의 구획을 나누어 그안에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에는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1508년(중종 3)에 세웠으며 신용개(1463∼1519)가 찬 하였고 신흠(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사개(1453∼152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영흥이며 영흥부사와 해주, 광주, 진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신도비 총고는 206.5㎝이고 관석의 전면에는 운문과 상단 중앙부에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다. 김안로가 찬 하였으며 1521년(중종 16)에 건립하였다.
    <성남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율동공원에 있는 청주한씨 묘역 및 용맥도

     

    ▼ 한계희 묘를 접근하는 방법으로 보통은 율동공원에서 진입을 하는데 이번에는 산 능선쪽에서 접근을 해서 들어갔다. 능선에 있는 주민 체육시설들...

     

    ▼ 한계희 묘로 들어가는 용맥..

     

    ▼ 한계희 묘로 들어가는 횡룡맥...

     

    ▼ 한계희 묘역... 뒤로 들어가서 묘역 후경을 먼저 살펴보았지만 편의상 앞쪽부터 사진을 올린다.

     

    ▼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안내판

     

    ▼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및 신도비 안내판

     

    ▼ 한계희 묘역 전경... 묘 앞에 신도비가 있다.

     

    ▼ 한계희 신도비

     

    ▼ 한계희 묘

     

    ▼ 한계희 묘 전경...상석에 묘비가 새겨져 있다. 

     

     ▼ 한계희 묘 석물

     

     ▼ 한계희 묘 후경 

     

     ▼ 한계희 묘 윗쪽에는 부인 함양여씨 묘가 있다.

     

    ▼ 한계희 배위 함양여씨 묘 석물 

     

    ▼ 한계희 묘 입수도두 

     

    ▼ 한계희 묘역 후경... 청룡,백호쪽 

     

    ▼ 한계희 묘 후경

     

     

    ▼ 한계희 신 신도비...율동공원 건너편 길 옆에 아들 한사문 신도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 한계희 신도비 

     

    ▼ 한계희 신도비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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