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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성남]청주한씨 한사문(한계희 子)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4. 6. 10:00

    청주한씨 한사문(한계희 子) 묘

     

    청주한씨 한계희 묘 청룡자락에는 묘가 2기가 있는데 아랫쪽 묘가 한사문 묘로 알려져 있다. 한사문은 한계희의 장남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묘역은 묘표나 묘비가 없어서 2기중 어느것이 한사문 묘인지 알 수 없으나 기록이나 감으로 아랫쪽이 한사문 묘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윗쪽 묘는 부인묘로 추정이 되지만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다.
    새로 세운 신도비를 샅샅히 확인해 봤는데 첫째부인이 김숭해의 女, 둘째부인이 무송군(茂松君)의 女로 나와있는데 무송군이 누구인지 정확한 내용은 없다. 뭔가 밝힐 수 없는건지....
    보통 신도비는 사후 30여년이 지나서 세우는데 여기 청주한씨 신도비는 3기 모두 사후 1년여만에 세웠다. 어떤 뜻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사문 신도비 뒷편에 나온 내용을 읽어보니.... 아들2명,사위들이 있지만 모두 관직이 낮아서 나중에 비문조차 세우지 못할것을 우려해서 서둘러 신용개에게 부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부인에 대한 내용이 어디에도 나오지 않아 덕분에 한사문 신도비를 한번 읽어보게 되었다.

     

    한사문(韓斯文)

     

    1446년(세종 28)∼1507년(중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예(子藝).
    좌찬성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 한계희(韓繼禧)의 아들이다. 공신의 자제로서 1462년(세조 8) 음보(蔭補)로 문소전직장(文昭殿直長)에 임명된 뒤 세자익위사세마 겸 선전관(世子翊衛司洗馬兼宣傳官)‧이조정랑‧군기시첨정‧부정(副正)을 거쳐, 부평‧철원‧강화의 부사를 역임하였다.
    1478년(성종 9)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이 되고, 집의‧제용감정(濟用監正)‧통례원좌우통례(通禮院左右通禮)를 거쳐, 1492년 우부승지‧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495년(연산군 1) 가선대부가 되고 아버지의 봉작(封爵)을 물려받아 서천군(西川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개성부유수, 이어 한성부좌윤이 되고, 1498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0년 대사헌이 되고, 이해 다시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와 공조의 참판을 지냈다. 이어 공조판서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1506년 함경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이 되었다. 이해 중종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어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4호

    문화재명칭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신도비(한계희,한사문,한사개)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 2-1(율동공원 내)

    관리자(연락처)

    청주한씨 문정공파 종회

     

    청주한씨 문정공파 묘역

     

    한계희(1423∼1482)는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문정이며 우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기내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특히 세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최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고 1447년(성종 8) 의방유취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신도비는 개석이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이었던 화관석, 비신, 기대로 이루어졌고 화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화강편마암으로 화강암인 기대에 꽂아 세우게 되어 있다. 규모는 화관석이 폭72cm, 두께23cm, 높이52cm이고 비신이 61×18×152cm 기대가 115×59×44cm이며, 총고 48cm이다. 신도비문은 서거정(1420∼1488)이 찬하고 안침이 전과 글씨를 썼다. 건립년대는 1483년(성종 14)이다.

    한사문(1446∼150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공간이며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으며 신도비는 총고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앞.뒷면에는 각 4개와 2개의 구획을 나누어 그안에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에는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1508년(중종 3)에 세웠으며 신용개(1463∼1519)가 찬 하였고 신흠(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한사개(1453∼152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영흥이며 영흥부사와 해주, 광주, 진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신도비 총고는 206.5㎝이고 관석의 전면에는 운문과 상단 중앙부에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다. 김안로가 찬 하였으며 1521년(중종 16)에 건립하였다.
    <성남시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율동공원에 있는 청주한씨 묘역 및 용맥도

     

    ▼ 한계희 묘의 청룡자락에 아들 한사문 묘가 있다.

     

    ▼ 한사문 묘 전경

     

    ▼ 한사문 신도비

     

    ▼ 한사문 묘 석물

     

    ▼ 한사문 묘 문인석과 신도비

     

    ▼ 한사문 묘에는 묘표가 없다.

     

    ▼ 한사문 묘 윗쪽에 있는 묘... 이 역시 묘표가 없어서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계희 묘의 예로 보아 윗쪽에 배위 묘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 한사문 묘 윗쪽 묘 전경

     

    ▼ 한사문 묘 윗쪽 묘 석물

     

    ▼ 한사문 묘 후경

     

     

    ▼ 율동공원 반대편 길가에 있는 한사문 新 신도비

     

    ▼ 한사문 신도비를 읽어보면 한사문은 첫째부인 김씨에게 1녀, 둘째부인 무송군의 女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둔 것으로 되어있다. 아들은 한윤원,한윤근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부인들에 대한 내용은 많이 생략이 되어있어 알 수가 없다. 묘역 윗쪽에 있는 묘가 어떤 부인인지도 나와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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