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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공주]남이웅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4. 19. 10:03

    남이웅 묘

     

    3월 시산제를 겸해 풍수답사로 공주를 다녀왔다. 그 중에 일부는 이미 몇차례 다녀온 묘들이고 남이웅

    선생 묘는 처음갔다. 풍수에서 말하는 사격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찾기도 비교적 쉬운 곳이어서 

    올려본다.

    그동안 다녀온 곳이 여러곳인데 정리하여 올리는데 시간이 걸려서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 지난 가을에 

    다녀온 곳을 지금 올릴려고하니 그것도 이상하고.. 하여 일단 최근에 다녀온 곳 위주로 올리고 시간이 

    허락하면 나머지 묘들은 하나하나 정리해서 답사기를 올릴 예정이다.

    남이웅(南以雄)
    1575년(선조 8)∼1648년(인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 남위(南瑋)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세마(洗馬)‧위수(衛率)‧통례(通禮)를 거쳐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수찬‧응교 등을 지냈다.
    당시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보자고 청할 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오위장(五衛將)‧황해도관향사(黃海道管餉使)‧안악군수‧의주부윤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황주수성대장(黃州守城大將)으로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춘성군(春城君)으로 봉해졌다.
    1626년(인조 4)에는 형조참판에 부총관을 겸하였다.
    1632년 인목대비의 상사(喪事)에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나이 60이 되었는데도 능을 지키는 예법에 조금도 어김이 없으므로 주위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뒤 호조참판‧형조판서 겸 지의금부도총관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겪고, 이듬해 소현세자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잡혀갈 때 우빈객으로 세자를 극진히 호위하였으며, 그뒤 돌아와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1638년 대사헌이 되어 법을 엄하게 집행하였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음사(淫祠)를 파괴하고 무당을 학대하였다.
    1646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 昭顯世子의 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여 사직하였다.
    그뒤 1648년 좌의정이 되었다. 본래 세업(世業)이 풍족하여 부자라고 일컬었지마는, 그 법제를 준수하며 자손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사치를 억제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남이웅 묘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봉곡리 12-3
       의령남씨


     

     

     

     

     


    ▼ 남이웅선생 묘 원경..

    ▼ 남이웅선생 묘

     

    ▼ 남이웅선생 묘표

    ▼ 남이웅선생 묘 석물

     

    ▼ 남이웅선생 묘 앞 사격.. 오행성이 모두 있고 그중에서 보기 좋은 탐랑성이 조산으로 앉아있다.

    ▼ 남이웅선생 묘 청룡쪽 후경

    ▼ 남이웅선생 묘 백호쪽

    ▼ 남이웅선생 묘 후경... 향은 앞쪽 금성체에 맞추었다. 명당이 약간 경도되어 있고 좌측 청룡이

    맥을 끌고나가 흠으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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