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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백장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8. 2. 10:00
백장선생 묘
전북 장수에 친척이 거주하여 여름휴가를 이용해 방문했다. 제버릇 뭐 못준다고 인근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
하루 돌아다녔다. 그 중에서 고려말에 지조를 지킨 백장선생 유적지를 찾아 묘소와 신도비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라 조금 생소하지만 전북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분으로 황희정승이 이곳에
유배 왔을 때 조석으로 문안을 드릴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백장(白莊)
1342년(고려 충혜왕 복4)∼1415년(태종 15). 고려 후기 충신. 자는 명윤(明允)이고, 호는 정신재(靜愼齋)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상서성상장군(尙書省上將軍)에 책훈된 백원정(白元貞)의 현손이다. 조부는 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承宣) 백연(白璉)이고, 부친은 밀직부사(密直副使) 백인경(白仁景)이며, 모친은 태자대부(太子大傅) 문정공(文貞公) 이장용(李藏用)의 딸이다.
천성이 순수하고 착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역리(易理)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자라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 등을 배우며 훗날 치국경세(治國經世)의 기량과 지조를 지키는 절개를 지니게 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야은(冶隱) 길재(吉再), 그리고 스승 정몽주를 포함한 삼은(三隱)에 버금가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16세 되던 해인 1357년(공민왕 6)에 성균관(成均館)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이후 원나라로 유학을 떠나, 25세의 나이로 원나라 과거에서 장원(壯元) 급제하는 등, 자신의 기량과 경륜을 넓혔다. 원나라에서는 그에게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의 관직을 내려 머물게 하려고 하였으나, 귀국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이부전서(吏部典書)‧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무신 이성계의 반란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개경(開京)을 떠나 강원도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든 선비들이 구름같이 많았다.
태조 이성계는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여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해미(海美)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후 태종은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등을 제수(除授)하며 그를 회유하였으나, 이 또한 거절하여 전라북도 장수현(長水縣) 임현내면(任縣內面) 호덕동(虎德洞) 위동(位洞)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장수현 장계(長溪)의 남쪽 유천(柳川) 언덕 위에 청심정(淸心亭)을 짓고,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방촌(厖村) 황희(黃喜)도 그곳으로 유배를 왔었는데 조석으로 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만큼,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동방의 백이(伯夷)’라며 의정부영의정 겸 영중추부사(議政府領議政兼領中樞府事) 및 이부전서 보문각대제학(吏部典書寶文閣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묘소는 전라북도 장수현 호덕동 뒤편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백충신묘(白忠臣墓)라고 불린다. 인근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원주(原州)의 죽림서원(竹林書院)에 배향되었는데, 서원은 상덕사(尙德祠)로 사액되었다. 1828년(순조 28)에는 장흥 유림들이 월강서원(月岡書院)을 창건하고 그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며, 1948년에 다시 복원하여 배향하고 있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전라북도 기념물 제101호 백장선생 유적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산42-1(성관사입구 반대편) 수원백씨정신제공파대종회 백장선생 유적
이 유적은 고려 말의 충신인 백장(1342~1418)선생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백장은 황희와 함께 장수군의 이덕(二德)중 한 분으로 포은 정몽주로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고려 공민왕 6년(1357)에 과거에 합격하고, 높은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강원도 치악산으로 은거함으로써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조선 태종이 몇 차례 관직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거절하였으며, 태종 5년(1405년) 장계면 월강리로 유배되었다.그보다 후에 장수로 유배 온 황희는 아침 저녁으로 백장에게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백장의 위패는 월강리에 있는 월강사에 모셔져 있고, 묘소와 신도비가 호덕마을 위에 있다...<장수군 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 장계면에서 계북면으로 가는 도로변에 세워진 안내판... 반대편은 성관사 입구이다.
▼ 백장선생 신도비... 왼편이 구 신도비...
▼ 백장선생 신도비... 뒷쪽 산이 아주 준수하다.
▼ 백장선생 구 신도비...
▼ 백장선생 신 신도비...
▼ 백장선생 유적 안내판...
▼ 백장선생 묘역 전경
▼ 백장선생 묘.. 뒷쪽이 백장선생 묘.. 앞쪽 묘는 표기가 없으나 배위 묘로 생각된다.
▼ 백장선생 묘
▼ 백장선생 묘 전경
▼ 백장선생 묘비
▼ 백장선생 묘 석물.. 근자에 세운 것이다.
▼ 백장선생 묘 청룡쪽 후경
▼ 백장선생 묘 백호쪽 후경
▼ 백장선생 묘 후경... 묘 앞쪽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 백장선생 묘 뒷쪽으로 도로가 나서 과협처를 건드렸다.
▼ 백장선생 묘 현무봉... 아주 준수한 현무봉이다.. 도로가 가로지른다.
▼ 백장선생 사당 숭의제 입구
▼ 백장선생 사당 숭의재 원경
▼ 백장선생 사당 숭의제 삼문 포충문
▼ 포충문으로 보이는 숭의제
▼ 백장선생 사당 숭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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