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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이일장군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2. 9. 21. 10:00
이일장군 묘
이일장군 묘 근처는 도로공사로 한창 바쁘다. 길을 제대로 들어섰는데도 입구가 복잡하여 제대로 왔는지
의심이 가는 곳이다. 이런 곳은 묘지를 찾고서도 별로 내키지 않아 대충 돌아보고 나오게 된다.
나오면서 보니 인근에 문화재로 지정된 또다른 묘가 있었는데 그냥 지나쳐 내려오고 말았다.
풀이 우거져 묘역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묘역까지 들어가는 길이 비가 내려서 질퍽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길이 아주 어렵게 되어있다. 네비로 찍고 가는 길 자체가 차가 푹 파질 정도로
험한 길이다.
묘지답사를 하다보면 왠지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고 다녀와서도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 곳이 있다.
그런 곳 중에 한 곳이라고 생각하자...
이일(李鎰)
1538년(중종 33)∼1601년(선조 3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重卿).
1558년(명종 13) 무과에 급제하여 경성판관 등을 거쳐 1583년(선조 16) 전라좌수사‧경원부사를 지냈다.
1587년 함경도북병사가 되어 이탕캐(尼湯介)의 난을 평정하고, 녹둔도(鹿屯島)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이듬해인 1588년 두만강을 건너 여진의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소탕하여 가옥 200여동(棟)을 불사르고, 여진족 380여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1589년 전라병사가 되어 신립(申砬)‧정언신(鄭彦信) 등과 변방의 군비상황을 의논하였다.
1592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순변사가 되어 북상하는 왜적을 상주에서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고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도순변사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사잇길로 도망하여 황해‧평안도로 피하였다.
이때 세자 광해군을 3,000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전투(王城灘戰鬪)에서 왜적 80여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패주한 죄가 큰 것을 들어 처벌을 요청하는 신하가 있었으나, 경험이 많은 무장이라 하여 이를 용서하였다.
그뒤 지중추부사‧비변사당상‧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 군사들을 조련시켰으며,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유지에 힘썼고, 충청도에서 송유진(宋儒眞)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그 뒷수습을 맡았다.
1595년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도북병사가 되고, 지중추부사‧행호군을 거쳐 함경도남병사가 되었다.
1601년 부하를 죽였다는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증보제승방략(增補制勝方略)》이 있다. 시호는 장양(壯襄)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용인시 황토유적 제21호 이일장군 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매산리 산108-1 용인이씨
▼ 이일장군 묘 원경
▼ 이일장군 묘
▼ 이일장군 묘
▼ 이일장군 묘 측경
▼ 이일장군 묘 안내판
▼ 이일장군 묘 전경
▼ 이일장군 묘비
▼ 이일장군 묘 석물
▼ 이일장군 묘 입수도두..
▼ 이일장군 묘 후경.. 비가 오락가락한 날씨여서 무척 습도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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