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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봉]연산군(燕山君) 묘답사는 즐거워/조선왕릉답사 2013. 1. 30. 10:00
연산군(燕山君) 묘
연산군묘는 왕릉답사를 처음 시작할 때 무척 궁금했었는데 맨 마지막으로 찾았던 조선왕릉이었다. 물론
왕릉이라 표현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선왕계보를 잇는 릉,묘를 모두 찾았다는데 무척 기분이 좋았었다.
그 후로도 여러번 연산군묘를 다녀왔는데 갈 때마다 조금씩 변하더니 지금은 공원으로 잘 가꿔져 있다.
이번 방학동 답사는 연산군묘를 비롯하여 주위에 있는 여러 묘를 답사하기 위해 나홀로 나섰다.
많은 곳에서 철망으로 출입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져 들어가지 못했는데 도심부근에 있는 묘역은 외부인
출입을 못하게하려고 철망으로 쳐놓아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든다. 이런 묘들은 문화재일 경우에는
철망 밖에서라도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보지만 문화재가 아닌 경우에는 그냥 포기하고 돌아선다.
이번 방학동 지역 묘지답사는 연산군묘부터 시작하여 부근에 있는 유명인의 묘를 두루 돌아다녀왔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전체적인 방학동 묘지 일람을 만들어 올릴 예정이다.
연산군묘를 다녀올 때면 나는 항상 내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낀다. 왜일까? 폭군의 묘 앞에서 통쾌해
하든지 연민을 느끼든지 해야하는데 왜 나는 내가 초라해지고 자꾸만 못나게 느껴지는 것일까?
얼마전 서방파두목으로 있던 분이 세상을 떠났는데 언론이나 방송 등에서 크게 다루고 경찰들이 경계를
서는 등 무척 특이한 현상을 보게 되었다. 연산군은 어떻든 왕을 12년간이나 해먹은 사람이다.
세상은 좋은 자리든 나쁜 자리든 최고자리에 앉은 사람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나같은 존재감조차 별로 없는 사람은 초라함을 느낄 수 밖에...
누군가 내게 한 말이 기억난다. 최고들은 최고를 알아본다고... 그래서 최고끼리만 만나고 최고들만을
위한 사회를 만들고 그래서 그 최고들이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겠지...
추운 날 연산군 묘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연산군(燕山君)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
재위 1494∼150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융(㦕). 성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관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혹은 尹起畝)의 딸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그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년 12월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선원계보 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그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炮烙 : 단근질하기)·착흉(斮胸 : 가슴 빠개기)·촌참(寸斬 : 토막토막 자르기)·쇄골표풍(碎骨瓢風 :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라고 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병고(兵庫)의 수리, 중국에 대한 현명한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조금도 없었다.
왜인과 야인의 침입을 의식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했다든가,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의 독려, ≪국조보감 國朝寶鑑≫·≪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즉위 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 정도 질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5∼6년 동안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사화는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지만, 여기에는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였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된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입은 사건이다. 이 때 그렇게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데는,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해 그들의 정쟁에 이용한 점도 있었다.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다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려고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했다.
훈구 재상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했고, 이에 또 한 번 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화의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되겠지만, 이 역시 그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사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당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당해 죽었다. 그 밖에 윤필상(尹弼商)·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정여창(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한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은 사실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실록 ≪연산군일기≫에는,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정계와 연산군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겨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 버렸다. 정언을 하는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했다. 그 밖에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으로 생각되던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이 곳에 ‘연사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석물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연산군(燕山君)묘 문화재청
▼ 연산군(燕山君) 묘 안내판
▼ 연산군(燕山君) 묘 상설도
▼ 연산군(燕山君) 묘 전경
▼ 연산군(燕山君) 묘 근경
▼ 연산군(燕山君) 묘
▼ 연산군(燕山君) 부인 신씨 묘
▼ 연산군(燕山君) 묘비
▼ 연산군(燕山君) 부인 신씨 묘비.. 글자가 마모되어 거의 안보인다.
▼ 연산군(燕山君) 묘역 장명등
▼ 연산군(燕山君) 묘역 문인석
▼ 연산군(燕山君) 묘 석물
▼ 연산군(燕山君) 부인 신씨 묘 석물
▼ 연산군(燕山君) 묘 측경..
▼ 연산군(燕山君) 묘 후경
▼ 연산군(燕山君) 묘역으로 들어오는 입수도두
태종의 마지막후궁 義貞宮主趙氏墓
義貞宮主 趙氏는 본관이 한양인 조뢰(趙賚)의 딸로 태어나 세종 4년(1422)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의정궁주 조씨묘가 연산군묘역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였으며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게 되어 현 위치에 의정궁주묘를 조성하였고 그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하여 의정궁주 묘 위 쪽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묘 안내책자에서 인용>
▼ 태종의 마지막 후궁 의정궁주 조씨묘 전경
▼ 태종의 마지막 후궁 의정궁주 조씨묘 석물
구문경(具文景)과 휘순공주(徽順公主)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과 부인 휘순공주의 묘소다. 구문경의 부친은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을 임사홍 등과 함께 도왔으나 마지막엔 중종 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2등에 오른 한성부 판윤 구수영, 조부는 지중추부사 구치홍, 증조부는 공주목사 구양이다. 또한 세조조 영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의 본보기였던 충렬공 구치관은 구문경의 종조부이며, 원종(정안군)의 국구로 인조의 외조부가 되는 능안부원군 문의공 팔곡 구사맹에게 구문경은 종조부가 된다.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세종 이도의 손녀이며 영응대군 이염의 딸이다. 부인은 연산군과 왕비 신씨 사이의 딸로 공주에 봉해졌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함께 공주 자리에서 폐해진 휘순공주다.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되면서 구문경과 휘순공주 역시 모두 부마와 공주의 자리에서 폐해져서인지 그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구문경의 부친 구수영은 연산군을 배신하고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에 오르며 목숨을 부지하였고 연산군의 사위로 권력을 누렸던 구문경 역시 반정 이후에도 부친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 부자는 반정 이후 폐출된 임금의 딸이었던 휘순공주를 쫓아내며 새로운 조정에 나가기를 원했으나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다시 공주를 며느리와 부인으로 받아들였다고도 한다.<네이버블로그 적선지가필유여경...에서 인용>
▼ 연산군(燕山君) 딸 휘순공주 묘
▼ 연산군(燕山君)의 부마 구문경 묘
▼ 연산군(燕山君) 딸 휘순공주 묘비
▼ 연산군(燕山君) 부마 구문경 묘비
▼ 연산군(燕山君)의 부마 구문경과 딸 휘순공주 묘역의 석물
▼ 연산군(燕山君)의 부마 구문경과 딸 휘순공주 묘 후경
▼ 연산군(燕山君) 묘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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