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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도봉]횡보 염상섭(廉想涉)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2. 4. 10:00

    횡보 염상섭(廉想涉)묘

     

    <표본실의 청개구리>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대부분 들어본 소설이다. 내용은 잘 몰라도 제목하고

    작가는 시험에 많이 나오게 되어 거의 외우고 지낸다. 나도 그 정도의 수준...

    방학동의 천주교회화동성당 묘지에 여러 유명인의 묘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번 가봐야겠다

    생각만하고 미루고 있었는데 최근에 방학동에 풍수 특강을 다녀올 길이 있어서 인근의 묘역을

    돌아보다가 날을 정해 한번 다녀오기로 하고 이번에 다녀오게 되었다.

    방학동 묘역을 두루 돌아보는데 하루에 다 돌아볼 수 없어서 몇 차례에 걸쳐 나눠서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천주교성당 묘역에 들어가면 유명인 몇분이 잠들어 계신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만나게 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곳은 요즘의 공원묘지처럼 정리가 된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묘지가

    들어서서 어찌보면 무절제하게 배치된 듯해 보인다. 그래서 안쪽의 묘를 찾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다행히 유명인 묘는 길 옆에 있어서 찾기가 쉬어 괜찮았지만 그래도 몇몇 묘는 찾을 수 없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이곳을 포함해 방학동 일원의 묘역에 대해 정리를 할 생각이다.

    정리가 되면 다시 수정보완을 할 예정이니 조금 답답하더라도 참아주시면 감사....ㅎ

    염상섭(廉想涉)
    1897∼1963. 근대소설가.
    본관은 서원(瑞原).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제월(霽月) 또는 횡보(橫步). 서울 출생.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인식(仁湜)의 손자이며, 가평 군수 규환(圭桓)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慶州) 김씨, 부인은 의성(義城) 김씨영옥(英玉)이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1907년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官立師範附屬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반일 학생으로 지목되어 중퇴하였다.
    1912년 보성소·중학교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경도(京都) 부립제2중학을 졸업하고 1918년게이오대학(慶應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대판(大阪)에서 자신이 쓴 <조선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주동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금고형을 받고 학교는 중퇴한 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정치부기자가 되어 1920년 귀국하였다.
    한때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지만, 이후 줄곧 신문·잡지 편집인으로 생활하면서 소설·평론에 전념하였다. 문예전문지 ≪폐허 廢墟≫의 동인 활동을 계기로 습작기를 청산하고 출세작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를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이어 중편소설 <만세전>(1922)을 집필, 연재함으로써 그의 뛰어난 현실 인식이 확인되었으며,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저항적 반일감정을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갔으나 별 성과 없이 귀국하여 1929년 결혼을 하고 생활의 안정을 찾아 장편에 전념하였다.
    그는 대표작 <삼대 三代>를 비롯하여 <무화과 無花果>·<백구 白鳩> 등과 <사랑과 죄>·<이심 二心>·<모란꽃 필 때> 등 우수한 장편을 쓰기도 하였다.
    단편 역시 초기에는 암울, 침통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으나 사회 전반을 다루는 경향으로 나가면서부터는 보다 치밀한 관찰과 객관적 기술을 보임으로써 명실공히 리얼리즘적 경향을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제야 除夜>·<해바라기>·<금반지>·<고독>·<조그만 일>·<두 출발>·<남충서 南忠緖> 등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일제 말기 10여 년(1936∼1945)은 만주·신경에 살면서 ≪만선일보≫ 편집국장·회사 홍보담당관 노릇을 하면서 절필하였고,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다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6·25중에는 해군 소령으로 입대하여 반공 전선에 나가 휴전이 되는 해까지 정훈일을 보았다.
    제대 후 한때 서라벌예술대학장으로 있기도 하였지만, 창작에 정진하여 병중에도 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다. <삼팔선>·<임종>·<두파산>·<굴레> 등 단편과 <효풍>·<난류>·<취우>·<새울림>·<미망인> 등의 장편은 우수작으로 평가된다.
    1963년 3월 직장암으로 작고할 때까지 완성된 본격 장편 20여 편, 단편 150편, 평론 100여 편 이외에 기타 수필 등 잡문 200여 편의 글을 남기었다. 그 삶과 문학의 특징은 민족적이었고 전통적이었으며 야인적이었다. 식민지사회를 투철히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묘사하였다.
    또 전통적인 사실적 문체인 내간체를 계승, 발전시켜 자신의 문학의 골격으로 삼았고 서구 근대 물질문명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보수적인 자세를 보였다.
    윤리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두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더욱이,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하고 식민지적 현실을 부정하고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점은 돋보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정보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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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보 염상섭(廉想涉)묘
      
       천주교회화동성당


     

     

     

     

     

     

     

     

     

    ▼ 천주교회화동성당 묘지 일원(네이버블로그 배철식의 LIFE에서 인용)

    (배철식의 LIFE 바로가기)

    ▼ 횡보 염상섭(廉想涉)묘 입구 표지석

    ▼ 횡보 염상섭(廉想涉)묘 입구

    ▼ 횡보 염상섭(廉想涉)묘 전경...

    ▼ 횡보 염상섭(廉想涉) 묘비 뒷면

    ▼ 횡보 염상섭(廉想涉)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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