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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풍수답사)병조참판 김양(金諒)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4. 10. 10:00
(풍수답사)완벽한 局勢가 품은 兵曹參判公 김양(金諒) 음택
풍수답사를 다녀온 곳이다. 김양은 인물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이지만 묘역에서 바라보는
사격이 좋아 공부하는 차원에서 함께 하였다.
묘역에서 바라보는 곳에 옥인사와 귀인봉이 함께하여 인물이 예상되는 곳이고 우측에
늙은 쥐를 연상하는 사격과 창고사가 함께하여 흔히 표현하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사격도 볼만하다.
일반적으로 판단하는 풍수적 견해는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답사안내서로 대신한다.
김양(金諒)
본관이 영산(永山)인 김양은 고려 말 1384년(우왕 10) 갑자년(甲子年)에 출생하여 1455년(단종 3)에 졸(卒)하였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김수온의 삼촌이다. 묘비에 의하면 태종 조에 문과에 올라 전시소윤(典寺少尹)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오르고, 의검부사 오도총부도총관을 지냈다.
만년에 관직을 버리고 강상에 청강헌을 지어 시음(詩吟)으로 세상을 보내니 지상(地上)의 선인(仙人)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종경(宗敬)은 형제를 두었는데, 형이 신미대사와 김수온의 아버지인 훈(訓)이다. 설에 의하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터를 정하는데, 지사가 이곳은 심장(沈葬)을 하면 안 되는 자리로, 조금만 파 들어가면 구들장이 비치는데, 구들장 위에 시신을 모셔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 된 도리로써 어찌 박장(薄葬)을 할 수 있는가 하면서, 구들장을 들어내자 그 아래에 큰 벌 세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가 휭 하고 날아오르자, 지사는 물론 훈과 양이 깜짝 놀라 다시 구들장을 덮었지만 한 마리가 오얏골(지금의 고야골로 상용리 안 골)로 날아갔다고 한다. 지사가 벌이 떨어진 자리가 집터로서는 천하의 명당 터라고 말하자, 그 곳에 집을 지어 형인 훈과 함께 살았는데, 형은 사형제를 낳았고, 양은 형제를 두었다. 지금까지도 양의 자손들은 영산김씨 영동파로 고향을 지키면서 살고 있으며, 소파(小派)로는 자산파, 참봉공파, 봉사공파, 장수파, 이천 1, 2, 3, 4, 5, 6, 파가 산재되어 있다.
이곳 묘역은 바람 한 점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국세가 빽빽하고, 청룡방의 암공수(暗拱水, 草江川)가 내외명당을 감싸고 흐르며, 전방의 옥인사(玉印砂)가 귀(貴)로 작용한다. 또한 우측 전방의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사격이 창고사(倉庫砂)와 어우러지며, 손(孫)과 부(富)로 매김 된다. 좌향은 정침(正針), 봉침(縫針) 모두 간좌곤향(艮坐坤向)에 격침(格針)되며,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로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체용(體用) 모두 길격(吉格)이다.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석초 채영석선생 풍수답사기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관리자(연락처)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 영산김씨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 낮으막한 구릉에 음맥으로 봉긋 솟아서 내려온다.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갈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갈 측,후면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갈 중간쯤에 諱 諒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 석물... 용호가 잘 감싸주어 빈틈이 없어 보인다.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 후경... 앞쪽의 둥근 산이 옥인사, 멀리 조산이 귀인봉으로 인물이 나옴직하다.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 백호자락... 멀리 노서하전형 사격이 보인다.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 조안산.. 물이 명당으로 몰려드는 형상으로 길격이다.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 백호방에 있는 늙은 쥐를 연상시키는 사격...
▼ 병조참판 김양(金諒) 묘 가는 길에 있는 가정집에 현판이 요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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