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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연천]사간공 신호(申浩)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4. 12. 10:00

    사간공 신호(申浩) 묘

     

    연천 묘지답사를 준비하면서 미산면 부근의 묘를 찾다보니 신호 묘가 보인다. 누구인지

    인물사전에도 명확하게 잘 나오지 않아 대략 주소만 들고 찾았는데 의외로 쉽게 찾았다.

    입구의 재실이 있고 묘역 아래에 묘갈과 잘 알지못하는 묘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묘역에는 후손 묘가 먼저있고 가운데에 신호 묘가 있다. 특이한 것은 별로 안보인다.

    신도비는 나오면서 보니까 큰 길 가에 세워져 있었다.

    신호(申浩)
    미산면 유촌리의 나즈막한 구릉에 東南向하여 위치한다. 묘는 활개를 갖추고 있고 봉분은 원형으로 직경 610cm, 높이 180cm이며, 석물로는 봉분앞에 묘표와 문인석이 있고 나머지 여러 석물들은 근래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있던 문인석의 높이는 좌측 152cm·우측 156cm로 마모가 심하다. 묘표는 전·후 양면에 비문이 있는데 전면에 종1열로「戶曹判書思簡公申浩之墓」의 비문이 있고, 후면에는「宣德七年九月 日」로 1432년(세종 14)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좌측의 묘비에 있는 비신 전면에는 종1열로「資憲大夫戶曹判書思簡公申浩之墓」의 비문이 있다. 규모는 비좌가 높이 12cm·너비 41cm·두께 25cm, 비신은 높이 55cm·너비 34cm·두께 17cm, 화관석 높이 23cm·너비 44cm·두께 30cm이다. 묘갈은 묘역 입구에 남향하여 서있다. 비좌와 오석의 비신 및 팔작지붕 옥개석을 갖추었으며, 前·後·右 3면에 비문이 있다. 비액은 「戶曹判書思簡申公墓碣銘」이며, 비제는「資憲大夫戶曹判書謚思簡申公墓碣銘 幷序」이다. 비문은 가의대부 전 이조참판 閔丙承이 짓고, 丹山 張遇聖이 글씨를, 18세손 鉉國이 전자를 썼다. 문체는 대개의 비문이 行書의 정자체인 반면 草書에 가까운 문체이다. 건립연대는 1432년으로 규모는 비좌가 높이 16cm·너비 84cm·두께 52cm, 비신이 높이 146cm·너비 51.5cm·두께 25.5cm, 옥개석의 높이 49cm·너비 89cm·두께 64cm이다.

    신호(?~1432)는 고려말 조선초의 文臣으로 본관은 平山이며 集賢殿 翰林 琿의 아들이다. 1354년(공민왕 3)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자사, 우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으나 1360년 조부인 집현전 학사 군평(君平)이 관직에서 물러날 때 같이 사퇴하였다. 우왕이 즉위한 뒤에 집현전 한림 겸 직학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 교우가 두터웠던 정몽주와 이상계에 의해 공양왕이 옹립된 후 1390년(공양왕 2) 정몽주의 권유로 조정에 나아가 지신사가 되었으나 2년 후 조선이 건국되자 역성혁명에 비분을 느껴 평산에 은거하며 불사이군의 충질로 생을 마쳤다. 태조가 즉위 초에 전리판서에 임명하였으나 거절했다. 시호는 思簡이다..

    <연천군 선사관리사업소 홈페이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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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간공 신호(申浩) 묘
      
       평산신씨






     

     



    ▼ 사간공 신호(申浩) 묘 원경... 

    ▼ 사간공 신호(申浩) 묘역 앞에 있는 비석... 정확한 내력은 모르겠지만 사간공신도비 입석...뭐 이런 내용인 것으로 봐서

     신도비를 세우면서 세운 비석같아 보인다..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 사간공 신호(申浩) 묘갈... 총탄 흔적이 뚜렷하다.

    ▼ 사간공 신호(申浩) 묘갈 좌,우,후면...

     

    ▼ 사간공 신호(申浩) 묘역 오르는 계단 옆에 있는 망주석... 아마도 파묘지에서 가져온 망주석 같다...

    ▼ 사간공 신호(申浩) 묘갈과 석비...

    ▼ 사간공 신호(申浩) 묘 전경...

    ▼ 사간공 신호(申浩) 묘

    ▼ 사간공 신호(申浩) 묘표

    ▼ 사간공 신호(申浩) 묘비... 묘표에 있는 비명을 크게 써서 세워놓았다.

    ▼ 사간공 신호(申浩) 묘비 뒷면

    ▼ 사간공 신호(申浩) 묘비 측면

    ▼ 사간공 신호(申浩) 묘 석물...

     

    ▼ 사간공 신호(申浩) 묘 입수도두....

    ▼ 사간공 신호(申浩) 묘 후경

     

     

    신심(申鐔)
    1662(현종 3)∼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익중(翼仲), 호는 봉주(鳳洲). 대사성 민일(敏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 상(?)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명규(命圭)이며, 어머니는 감조관(監造官) 남호학(南好學)의 딸이다.
    1704년(숙종 30)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서(司書)·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도당(都堂)의 홍문록에 올랐으며 지제교(知製敎)로서 우윤 김경치(金?致)의 제문을 지었다.
    수찬(修撰)·헌납(獻納)·교리를 거쳐, 부사과(副司果) 때에 타고난 성격이 추려(??)하고 지론이 괴패(乖悖)하다는 간원(諫院)의 탄액으로 파직당하였다. 이조참판 이만성(李晩成), 이조참의 이태좌(李台佐), 이조정랑 이재(李縡)의 상소로 교리에 복직되었다.
    응교·집의를 거쳐, 승지 때에 왕에게 진하(陳賀)를 하지 않은 예관(禮官)은 바꾸어야 한다고 아뢰어, 예조판서가 바뀌었으며, 이조참의·대사간을 지냈다. 문학언의(文學言議)에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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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사간공 신호(申浩) 묘 아래에는 이조참의 신심의 묘가 있다.  

     ▼ 이조참의 신심의 묘

     ▼ 이조참의 신심의 묘

     ▼ 이조참의 신심의 묘 망주석... 오석으로 된 것은 허목선생 묘의 것과 같다.

     

     ▼ 이조참의 신심의 묘 후경

     

    ▼ 사간공 신호 재실...

    ▼ 큰 도로 입구에 세워진 신호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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