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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연천]신라 마지막왕 경순왕(敬順王) 릉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3. 4. 13. 11:29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敬順王) 릉

     

    신라 경순왕릉은 오래전에 다녀온 곳인데 아마도 그때는 블로그를 만들지 않은 때라

    자료가 없는 모양이다. 있는줄 알고 찾아봤더니 자료가 안보인다. 요즘은 정신이

    까물까물해져서 자료를 올렸는지 올리지 않았는지 그것조차 잘 모른다..ㅎ

    연천일대는 군사지역이라 답사에 제약이 많은 곳이다. 사전에 잘 알아보고 출발해야

    낭패를 면한다. 민통선 안쪽은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시국이 어수선해지면 출입이 제한된다.

    다행히 경순왕릉은 답사에 제한이 없는 곳이다. 경순왕릉만 철조망으로 보호하여

    그곳까지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왕이다보니 그곳에 가면 을씨년스러움이 묻어났었는데 이번에는 초봄에

    찾고 아침에 찾아서인지 그런 느낌은 많이 없어진 것 같았다. 입구를 잘 정비하여

    보기 좋게 한 것도 그런 느낌을 줄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경순왕(敬順王)
    신라 제56대 국왕[생몰년: ?∼979(경종 3),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며,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 혹은 實虹·乍慶)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고,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이며,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王建)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하였다.
    경명왕(景明王)이 즉위할 무렵 이미 지방에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정권이 형성되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918년(경명왕 2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경명왕이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또 경명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애왕(景哀王)이 더욱 친고려정책(親高麗政策)을 추진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덕왕(神德王), 경명왕, 경애왕은 아달라계(阿達羅系)의 후손으로 박씨 왕계였다.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신덕왕부터 경애왕까지 이어진 박씨 왕계가 다시 경순왕이 옹립됨으로써 김씨 왕계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했는데, 수십 일을 왕경에 머물면서도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조금도 범법(犯法)하지 못하게 하였다.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935년 3월 견훤이 장남 신검(神劍)을 비롯한 형제들의 음모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일이 벌어졌다. 3개월 후 6월 견훤은 유폐되어 있던 절을 탈출하여 고려군이 점령하고 있는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로 일단 피신했다가 고려 태조의 도움으로 개경으로 망명하였다. 견훤은 태조로부터 상보(尙父)의 존칭을 받았고, 그 지위가 백관(百官)의 위에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놀란 경순왕은 더 이상 보호국의 처지에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935년 경순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국가를 고려에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 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태자보다 위인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였다. 그런 다음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채용하였다. 또한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978년(경종 3) 4월에 승하하였다. 무덤은 장단에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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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문화재청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敬順王) 릉 입구....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敬順王) 릉 소개 안내판... 뒤로 지뢰 팻말이 이채롭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敬順王) 릉 능표 안내문...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안내문...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원경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주변....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과 비각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앞에 있는 릉 안내판...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재실...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비각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비 전, 후면...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전경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을 아침 일찍 찾았다. 원래 능상에 오르지 못하도록 되어있는데 관리인께서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전경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릉표와 상석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표 전, 후면...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장명등... 원래의 릉이 실전되다가 조선 영조 때 찾게되어 릉도 그때 다시 만들어서 석물도 그때의 것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석물...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곡장과 입수도두...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측경...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입수도두...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후경...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후경..청룡쪽...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 후경.. 백호쪽

     

     

    ▼경순왕(敬順王) 릉 가는 길에 있는 경주김씨 선조들의 묘역...

    ▼경주김씨 선조들 묘역에서 바라본 경순왕릉 입구...

    ▼신라 경순왕(敬順王) 릉은 민통선 안에 있어서 철조망으로 완전히 같혀 있고.. 도처에 경고문이 보인다.

    ▼살벌한 분위기를 많이 완화해주는 조각.. 이녀석은 두꺼비야 토끼야?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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