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릉의 홍살문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순히 시간의 차이일까? 아니면 시간
외적인 그 무엇이 있는걸까? 이번 서울문화유산답사에 참석하면서 이런
의문을 한 번 던져보면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인릉의 정자각과 비각
헌인릉...
제가 고등학교 때 가을 소풍을 왔던 곳인데 그때는 헌인릉 입구 길가에
코스모스가 활짝피어서 친구들과 온갖 포즈를 취하며 찍은 흑백사진이
지금도 제 앨범 속에 있습니다.. 불현듯 그 때의 추억이 떠오르더군요...
어느 해인가 5월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와서 딸기를 맛있게
따먹던 기억도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한참 후에 왕릉 답사를 하면서 헌인릉에 왔을 때는 비가 몹시도 내리던
날이었는데 아들 녀석과 함께 인릉을 오르고 헌릉을 오르면서 열심히
설명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헌릉의 답사길...
왕릉 답사를 어느 정도 하다보니 릉에 오를 때 느낌이 항상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각 릉 마다 분위기와 그 왕의 업적에 따라
체험적으로 느껴지는 현상이 다름을 느끼게 됩니다...
헌인릉의 헌릉(獻陵)은 조선 제3대 태종(太宗)과 원경(元敬)왕후의
능으로 쌍릉이며, 인릉(仁陵)은 제23대 순조(純祖)와 순원(純元)
왕후의 능으로 합장릉입니다.
홍살문에서 본 헌릉
헌인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능상까지 공개가 되어 왕릉답사를 하는
답사객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헌인릉은 과거와 달리
입구가 많이 개발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안기부가 대모산 아래 헌인릉
옆으로 이전하면서 생긴 모습입니다... 국가에서 하는 일을 일개
범부가 뭐라하기는 뭐하지만 왕릉 옆에 안기부가 있음으로 인해 많은
폐혜가 있어왔음을 아는 국민이라면 헌인릉 옆에 안기부가 온 것을
환영할리 없으리란 생각은 자명하지 않을지...
과거 의릉(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릉)은 안기부로 인해 무지막지
하게 파헤쳐졌다가 복원이 되는데 수백억원의 돈이들었고 명릉(서오릉
경내에 있는 숙종과 두 왕비의 릉)은 보안사로 인해 지난해에야 겨우
공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안개 낀 헌릉에서 바라본 안산과 조산...
아침의 왕릉은 자욱한 안개 속에 신비감을 더해 줍니다. 신라 왕릉을
답사하는 데에는 보름달이 뜰 때와 아침 안개가자욱한 때 답사해봐야
제맛을 안다고 했는데 어느 왕릉이든 아침 답사는 자욱한 안개를
동반하게 되어 과거와 현세를 연결하는 영화에서의 화면처리 기법과도
같아서 답사객들에게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
같습니다.
헌릉.. 좌측이 태종, 우측이 원경왕후
헌인릉 구조상 먼저 인릉을 거쳐서 헌릉으로 향해야 합니다.
두 릉 사이의 시간적인 격차는 무려 400여년의 차이가 있지만
한 곳에 있다보니 일반인들은 동시대의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곳의 릉제는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곳입니다.
헌릉은 조선 초기의 릉제에 따라 세워진 릉이고 인릉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릉제로 되어있다보니 공부하기에 안성마춤인 그런 곳입니다.
비록 위치상 인릉이 먼저지만 그래도 답사기를 적을 때는 헌릉부터
적는게 순리라 생각되어 헌릉부터 올립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고,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 2년(1400)에 왕위를 물려
받았습니다. 그리고 재위 18년(1418)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종 4년인 56세에 승하하였습니다.
원경왕후 민씨는 정종 2년에 정빈에 책봉되고, 정비가 되었으며, 세종
2년에 56세로 승하하였습니다.
헌릉의 문인석
조선왕릉 중에 헌릉은 여러가지로 특이한 것이 많은데
첫째로 신도와 어도로 나뉜 참도가 하나 뿐이란 점, 정자각의 월대
높이가 다른 곳에 비해 낮고 그러다보니 신계와 동계가 없는듯
하다는 점, 정자각 뒤로 신로가 길게 깔려있고 비각에 비석은 없고
신도비가 놓여있는 점 등 초기 조선왕릉의 특징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헌릉은 쌍릉의 형식이 잘 돋보인 왕릉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좌우로 각각 네쌍씩 있고, 석양, 석호, 석마도 좌우로 각각 네쌍씩
있습니다.
헌릉의 무인석
헌릉에 오르면 왠지모를 무게감이 느껴지며 옆에 있는 인릉에서의
느낌과는 많은 차이가 느껴집니다. 이곳에 오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합니다. 아마도 석물들이 많고 600여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런 느낌이 들겠지만 태종의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도 한 몫 했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옆에서 본 인릉의 석물
인릉(仁陵)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입니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 하였으며,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
하는 등 외척에 의한 폐단이 극에 달하여 사회가 혼란해졌습니다.
순조가 승하하고 한 달이 지난 후에 파주에 있는 장릉(인조)의 화소
지역에 장사를 치렀으나 후에 풍수상 문제가 거론되어 철종 7년에
지금의 헌인릉 자리로 천장하였습니다.
정자각과 비각 사이로 본 인릉
대부분 다른 능의 문무인석은 너무 크거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곳이 많으나 인릉의 문·무인석 조각은 사실주의적이며, 섬세하여
보기 좋습니다. 인릉은 합장릉이면서도 혼유석은 하나입니다.
정조 건릉 이전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두개를 두었으나 그 이후의
합장릉은 혼유석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단릉처럼 보이나 왕과 왕비가 나란히 있는 합장릉입니다.
인릉의 정자각
헌인릉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태종은 생전에 왕권강화와
외척들의 정치세력화를 극히 염려했는데 옆에 있는 400년 뒤의
인릉의 주인공이신 순조 때에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으니
태종은 무덤에서도 맘이 편치 않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헌릉의 혼통로..혼이 서로 오고 가는 곳이라네요..
또한 원경왕후와 생전에 그렇게 원수지간으로 지냈는데 죽어서
굳이 나란히 붙여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한 번 생각해볼 일입니다.
영혼이라도 편하게 해줘야 되는건 아닌지..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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