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서울 종로]서울시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설치현황(종로구)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0. 8. 10:00

    서울의 종로구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서도 궁궐이 밀집되어 있고 각 관청과 시설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던 곳이어서 역사문화유적지가 가장 많은 곳입니다.

    따라서 기념표석 또한 가장 많을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이곳의 특징은 기념표석이 가까운 거리에 다수가 밀집되어 있어서 관심있는 분들이

    답사를 하실 경우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설치현황의 관리번호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서울시에서도 특별히 관리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가

    자료를 편리하게 관리하려는 뜻에서 임으로 임시관리번호를 부여하였습니다.

    이점 착오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표석의 위치를 표기하지 못하였는데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각 표석의 위치를 상세하게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답사하는 순서는 관리번호와는 상관없이 추후에 별도로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설치현황(종로구)


    임시
    번호

    자치
    구별

    설치
    연도

        

                

    종로1

    종로구

    1991

    6·10 독립만세운동 선창 터 (獨立萬歲運動 先唱址)

    1926610일 순종(純宗)의 국장행렬이 통과할 때 중앙고보생(中央高普生) 이선호(李先鎬) 등이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先唱)하였던 자리

    종로2

    종로구

    2001

    감고당터(感古堂址)

    감고당은 조선 숙종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가 살던 친정집이다. 인현왕후는 14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서인되어 6년간 감고당에 갇혀 살다가 환궁하였다. 지금은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로 옮겨져 있다.

    종로3

    종로구

    1987

    경기감영 터(京畿監營址)

    경기감영은 경기관찰사가 행정 사무를 보던 관청이다. 경기감영에서는 민정, 군정 및 사법 등의 업무를 맡았으며, 관하의 수령(守令)을 지휘 감독하였다. 이곳은 태조 2(1393)에 설치되어 건양 원년 (1896)에 수원으로 이전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종로4

    종로구

    2005

    경성궤도(京城軌道) 회사 터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까지 경성 궤도회사가 경영하던 궤도전차가 운행하던 시발지. 이 협궤전차는 승객 및 물자 수송, 교외 나들이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다.

    종로5

    종로구

    1992

    경시서 터(京市署址)

    조선시대 물가를 조정하고 상거래(商去來)를 감독하던 관아터. 종로구 견지동에서 이전해 왔다.

    종로6

    종로구

    2001

    경우궁터  景祐宮址

    이곳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위가 1824년부터 1908년까지 모셔졌던 사당이다. 경우궁은 갑신정변 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청나라 군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속여, 왕과 왕비를 이곳으로 오게하고, 수구파 대신들을 제거하여 혁신 내각을 구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종로7

    종로구

    2000

    계동궁 터(桂洞宮址)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조카이자 고종의 사촌형인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이 살던 집터이다. 조선 초기에는 이 근처에 제생원(濟生院)과 승문원(承文院)이 있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고종이 잠시 이곳으로 피신한 바도 있었다.

    종로8

    종로구

    1999

    노백린장군집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계원(桂園)노백린(盧伯麟 1875~1926) 장군이 1916년 망명할 때까지 거주하던 집터

    종로9

    종로구

    1988

    권율 도원수집 터 (權慄都元帥家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幸州大捷)을 거둔 도원수 권율(1537~1599) 장군집 터

    종로10

    종로구

    2000

    관상감 터(觀象監址)

    조선시대에 천문, 지리, 역수(曆數)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터. 고려시대의 서운관(書雲觀)을 세종대에 관상감으로 개편하였고, 측우기·물시계·해시계의 발명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1907년에 폐지되었다

    종로11

    종로구

    1990

    금위영 터(禁衛營址)

    임진왜란 이후에 설치된 오군영(五軍營)의 하나인 군영 터. 대궐의 경비와 서울 남쪽의 수비를 맡았는데 광복 후에 국립 국악원이 있었다

    종로12

    종로구

    2001

    금위영 서영 터(禁衛營西營址)

    금위영 서영은 조선후기 중앙에 설치된 5군영의 하나로서 궁성의 호위와 수도 방어를 담당하던 금위영의 한 분영이다. 금위영은 숙종 8(1682)에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의 건의로 설치되었는데, 본영(本營)인 신영(新營)은 정선방(현재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다.

    종로13

    종로구

    2004

    기당 현상윤선생 집 터 (幾堂玄相允先生家址)

    현상윤(1893~?)은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신문학운동을 일으킨 문학가이자 3·1운동을 주도한 독립 운동가이며 역사학자이다. 이곳에서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조선사상사(朝鮮思想史) 등을 저술하였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종로14

    종로구

    2001

    김가진집 터(金嘉鎭家址)

    김가진(1846-1922)은 애국계몽정치가이며 항일 운동가이다. 그는 1877년 급제한 후, 주일본 판사대신, 군국기무처 의원, 독립협회 위원, 대한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종로15

    종로구

    1988

    김상옥의거터                  金相玉義擧址

    1923년 의렬단(義烈團)원 김상옥 의사가 일제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의거한 자리

    종로16

    종로구

    1999

    김상용집 터 (金尙容家址)

    김상용(1561~1637)은 조선 인조 때에 재상을 지낸 문신이다. 병자호란 때에 임금의 친족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시조로 <오륜가(五倫歌)>등이 유명하다.  

    종로17

    종로구

    1992

    김상헌집 터(金尙憲家址)

    이 일대는 병자호란 당시 화의(和議)를 반대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집이 있던 곳으로, 그 후 안동(安東) 김씨가의 세거지(勢居地)가 되었다

    종로18

    종로구

    2004

    김수영 생가 터

    이곳은 시인 김수영(1921- 1968)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처음 연극을 하다가 1945년 잡지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廷)의 노래>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64)> 등이 있다.

    종로19

    종로구

    1992

    김옥균집 터(金玉均家址)

    조선말 개화파의 지도자인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이 거처하며 갑신정변을 논의하던 집 터(종로구 화동 260번지)

    종로20

    종로구

    1987

    김정희(金正喜)선생집터

    골목안 약50m 지점 백송이 있는 창의궁(彰義宮) 터는 곧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사시던 곳.

    종로21

    종로구

    2007

    김창숙(金昌淑) 선생 집터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이 광복 후 살 던 집터이다. 선생은 3·1운동 직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 제출을 주도하였으며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종로22

    종로구

    1998

    남이장군집 터(南怡將軍家址)

    조선조 세조 때 북방개척에 무공(武功)을 세워 이름을 떨쳤던 남이장군의 집터

    종로23

    종로구

    2000

    내수사 터(內需司址)

    조선시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관아의 터. 궁중에서 필요한 쌀, 옷감, 잡화, 노비 등에 관한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으며 1907년에 폐지되었다.

    종로24

    종로구

    2000

    내자시 터(內資寺址)

    조선시대 궁중의 쌀, 채소, 과일 등 생필품을 공급하고 연회 등을 관장하던 관청인 내자시(內資寺)

    종로25

    종로구

    1993

    대동단본부 터                 大同團本部址 

    이 곳(구기동 168)은 비밀항일결사 대동단이 자리하여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을 상해임정(臨政)으로 모셔가려는 등 독립정 책을 폈던 곳.                                                     

    종로26

    종로구

    2007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대한매일신보는 19047월 영국인 베델(Bethell)과 양기탁(梁起鐸)이 창간한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항일 민족 언론이다. 이 후 중동학교가 이 곳에서 문을 열었다.

    종로27

    종로구

    2006

    대한천일은행본점 터 (大韓天一銀行本店址)

    1899년에 창립한 민족계 근대은행으로 오늘날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창립 초기에는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였으며, 우리 고유의 회계법인 송도사개치부법을 사용하였다. 1906년 이후에는 일반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종로28

    종로구

    2001

    도염서 터(都染署址)

    도염서는 궁중에서 쓰이는 염료를 제조하고 직물을 염색하는 일을 주관하던 관청이다. 도염서는 육조의 하나인 공조 아래에 설치되었으며 세조 때에 모시, 비단, 가죽 등을 임금에게 바치는 일을 맡았던 제용감(濟用監)과 통합되었지만 이름과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어 조선말까지 존재하였다.

    종로29

    종로구

    2001

    도정궁터(都正宮址

    도정궁은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의 아버지이며 중종의 9남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도정궁의 건물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1979년에 건국대학교로 이전되어 현재는 경원당(慶原堂)이라 불린다.

    종로30

    종로구

    1995

    독립선언문 배부 터 (獨立宣言文配付址)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천도교 대표 등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검토 배부하던 곳

    종로31

    종로구

    1993

    보성사 터(普成社址)

    1919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인쇄한 천도교의 보성사가 있던 곳이다.

    종로32

    종로구

    1993

    31독립운동기념터;보신각앞 (獨立運動紀念址)(普信閣)

    19193·1독립만세 시위의 중심지로 4.23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선포한 곳.

    종로33

    종로구

    1993

    31운동 유적지 ; 유심사 터 (一運動 遺跡地) ; 惟心社址)

    3.1운동 당시 불교 잡지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가 있던 곳.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선생이 이곳에서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를 주도하였다.

    종로34

    종로구

    1993

    31독립운동기념터; 종로 YMCA (獨立運動紀念址)

    이 기독청년회관(YMCA)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써 3·1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

    종로35

    종로구

    1993

    31독립운동기념터; 중앙학림 (獨立運動紀念址) (中央學林)

    1919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중앙학림 학생들과 전국 불교인들의 시위 계획을 논의하던 곳.

    종로36

    종로구

    2001

    돈녕부 터(敦寧府址)

    돈녕부는 조선시대 종친부(宗親府)에 들어갈 수 없는 종친과 왕의 외척과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던 관청이다. 고종 31(1894)에는 돈녕원(敦寧院), 이후에는 귀족사(貴族司), 귀족원(貴族院) 등으로 개칭하였다. 광무 4(1900) 다시 돈녕원으로 개칭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종로37

    종로구

    1997

    동망봉(東望峰)

    동망봉은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단종의 명복(冥福)을 빌었던 곳이다. 영조 47(1771)에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자를 써서 이곳에 있는 바위에 새기게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종로38

    종로구

    2006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 (東亞日報創刊社屋址)

    19204월 민족언론을 표방하며 창간된 동아일보의 사옥터. 그에 앞서 1917년까지 기호학교와 그 후신인 중앙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동아일보사가 1926년 광화문 신축사옥으로 이전한 뒤에는 중외일보의 사옥이 되었다.

    종로39

    종로구

    1989

    동학당 터(東學堂址)

    이곳 동부 창선방(東部 彰善坊)에 있던 조선시대 한성 4부학당의 하나인 동학당 터

    종로40

    종로구

    2002

    등과정 터(登科亭址)

    등과정은 조선시대 무사들의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한 사정(射亭)이다. 사정이란 활터에 세운 정자를 말하는데, 등과정은 서울 서쪽 지역에 있는 다섯 군데 이름난 사정 가운데 하나였다. 갑오개혁 이래 궁술(弓術)이 폐지되면서 헐렸다.

    종로41

    종로구

    1990

    맹사성집 터(孟思誠家址)

    조선 초 세종 때 정승을 지낸 정맥리가 살던 집터. 그의 이름을 다서 맹감사현(), 맹현(孟峴)이라고 하며, 퇴청하면 이곳에서 피리를 불기를 즐겨했다.

    종로42

    종로구

    1994

    민영환집 터(閔泳煥家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 집 터(조계사 경내)

    종로43

    종로구

    1988

    박규수 선생집 터 (朴珪壽先生家址)

    조선조 말 근대화를 주장한 우의정(右議政) 환재(瓛齋) 박규수(1807~1876)선생집 터

    종로44

    종로구

    2004

    박인환선생 집 터(朴寅煥家址)

    이 곳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1955년에는 <박인환 시선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종로45

    종로구

    2001

    백련사 터(白蓮社址)

    백련사는 조선말 시(), (), () 삼절(三絶)로 이름났던 김유근(1785~1840)의 집이다. 그는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 판돈녕부사에까지 올랐던 당대의 세도가였다. 김유근은 이곳에 집을 마련한 후에 집 뒤에 있는 산봉우리가 백련봉인 것을 감안하여 백련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종로46

    종로구

    2000

    백록정 터(白鹿亭址)

    조선말 경기감사 심상훈(沈相薰)의 정자 터. 개화당 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갑신정변을 계획했던 곳인데 한적하고 주변 경관이 뛰어났었다.

    종로47

    종로구

    2003

    별기군훈련소 터 (別技軍訓練所址)

    조선 말 고종 18(1881)에 설치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훈련받던 곳. 신식 군대의 육성 없이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양반 자제를 선발, 일본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중위를 초빙하여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 별기군은 초록색 군복을 입었다 해서 초록 군대라고도 했고, 왜별기(倭別技)라고도 불렀다

    종로48

    종로구

    2001

    복정 터(福井址)

    복정은 조선시대 물이 맑고 맛이 좋아 궁중에서만 사용하던 우물이다. 평상시에는 뚜껑에 자물쇠를 채우고 군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함으로써 일반인들의 사용을 금했으나, 대보름에는 이 물로 밥을 지어 먹으면 일년내내 행운이 따른다고 하여 일반인들도 물을 길을 수 있게 하였다.

    종로49

    종로구

    2001

    봉상사 터(奉常司址)

    봉상사는 조선시대 종묘의 제향(祭享) 등 국가 제사, 시호를 정하는 일, 임금이 직접 예속 농민을 두고 제향에 쓸 곡식을 경작하던 적전(籍田)의 관리를 맡았던 관청이다. 태종9(1409)에서 세종 2(1420)까지 잠시 전농시(典農寺)라 부르기도 하였다.

    종로50

    종로구

    2001

    부침바위 터(付岩址)   Site of Buchim Rock

    부침바위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거나,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소원을 빌었던 바위이다. 2m 높이의 이 바위 표면에는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자국이 있었는데, 여기에 돌을 대고 비벼서 돌이 붙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종로51

    종로구

    1988

    북평관 터(北平館址)

    이 언저리 동부 흥성방(東部 興盛坊)은 여진(女眞) 사신을 유숙시켰던 집 터

    종로52

    종로구

    1991

    비변사 터(備邊司址)

    조선시대 외적의 방어와 국가 최고 정책을 논의하던 관아 터. 중종때 창설되어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음.

    종로53

    종로구

    1991

    사간원 터(司諫院址)

    조선시대 국왕의 잘못을 충고하여 정치를 바로잡던 관아 터

    종로54

    종로구

    2003

    사도시 터(司導寺址)

    조선시대 궁중의 미곡과 장() 등의 물건을 맡은 관청으로 태조1(1392) 고려의 제도를 따라 요물고(料物庫)를 설치하였다. 태종1(1401)에는 공정고(供正庫), 세종4(1422)에는 도관서(導官暑), 세조 6(1460) 사선서(司膳署)에 흡수되었다가 세조 13(1467) 도관서를 다시 설치하였고 이후 사도시라 개칭되었으며 고종19(1882)에 폐지되었다.

    종로55

    종로구

    2000

    사복시 터(司僕寺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수레, , 마구, 목장을 맡아보던 관청의 터. 궁중에는 내사복시, 도성에는 외사복시, 지방에는 목장을 두었다. 여기에 있던 외사복시는 1907년에 폐지되었다.

    종로56

    종로구

    2001

    사섬시 터(司贍寺址)

    사섬시는 종이돈을 만들고 외거노비가 세금으로 바치는 베인 공포(貢布)를 수납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태종 원년(1401)에 사섬서(司贍署)로 처음 설치되었고, 세조 때에 사섬시로 이름을 고쳤다. 숙종 31(1705)에 호조의 사섬색(司贍色)에 합쳐졌다.

    종로57

    종로구

    1991

    사역원 터                       司譯院 址

    조선시대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을 맡아보던 관아터. 조선말에한성전보총국이 있었음.

    종로58

    종로구

    2001

    사온서 터(司醞署址)

    사온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바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사온서는 고려시대의 제도를 본받아 태조 원년(1392)에 설치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폐지되었다. 이 일대를 사온섯골이라 하였는데 이곳에 사온서가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다.

    종로59

    종로구

    2002

    사포서 터(司圃署址)

    사포서(司圃胥)는 궁중의 채소밭과 과수원을 관리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원래 북부 준수방(俊秀坊:종로구 통인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고종 19(1882)에 폐지되었다.

    종로60

    종로구

    1996

       31운동 유적지 : 상춘원 터  (一運動 遺跡地 : 常春園址

    일제 강점기 천도교 소유의 상춘원(常春園)이 있던 곳, 19191월 손병희(孫秉熙)를 비롯한 천도교 지도부가 이곳에서 31운동을 계획했다.

    종로61

    종로구

    2005

    쌍홍문(雙紅門)

    이 곳은 효성이 지극한 조원(趙瑗:1544~1595)을 기려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웠던 터이다. 그의 아들 희신(希臣), 희철(希哲)도 이름난 효자여서 정문이름도 쌍홍문이라 했고, 효자동의 이름도 이들의 효자에서 유래하고 있다.

    종로62

    종로구

    2003

    서북학회 터(西北學會址)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하여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 조직한 애국 계몽 단체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10년에 강제 해산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한때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정치대학이 자리하였다.

    종로63

    종로구

    2001

    서십자각 터  西十字閣址

    서십자각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망루이다. 본래 궁궐의 궁은 임금의 거처를 뜻하고, 궐은 출입문 좌우에 설치된 망루를 뜻한다. 이에 따라 경복궁도 궁궐 담장의 양 끝에 궁 내외를 감시할 수 있도록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설치했는데, 지금은 동십자각만이 궁궐 담장과 분리된 채 남아 있다.  

    종로64

    종로구

    1985

    서울대학교 터

    194684일 국립 서울대학교로 발족, 19753월 관악산(冠岳山) 기슭으로 이전되었다.

    종로65

    종로구

    2001

    석양루 터(夕陽樓址)

    석양루는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의 집이다. 효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인 조양루(朝陽樓)와 반대로 석양볕이 잘 든다하여 석양루라 불렀다고 한다. 석양루는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물로 유명했는데 효종은 왕이된 후에도 자주 찾아와 형제간의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종로66

    종로구

    1999

    선공감 터(繕工監址)

    조선시대 토목과 영선(營繕)을 관장하던 관청인 선공감(繕工監)이 있던 자리

    종로67

    종로구

    1986

    성삼문 선생 살던 곳

    태종 18(1418) 태어나서 사육신의 한 분으로 세조 2(1456) 순절한 성삼문(成三問)선생 살던 집이 이 부근(화동 23번지)에 있었다.

    종로68

    종로구

    1986

    세종대왕 나신 곳

    서울 북부 준수방(이 근처)에서 겨레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태조 6(1397)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종로69

    종로구

    2001

    세창서관 터(世昌書館址)

    세창서관은 출판사 겸 서점으로서 1930년대 신태삼(申泰三)이 설립하였다. 주로 편지류, 창가집, 고소설류를 출판하였는데, 주요 출판물은 편지류인 언문편지(言文片紙)투와 창가집인 모던서울창가집(唱歌集), 고소설인 배비장전(裵裨將傳),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등이다.

    종로70

    종로구

    2001

    소격서 터(昭格署址)

    소격서는 도교의 사당이다. 태조 5(1396) 정월에 도교의 제사 의식을 행할 목적으로 소격서라는 중앙 관청을 이곳에 건립하였다. 성리학자들이 소격서를 없애려고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연산군과 중종 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종로71

    종로구

    1993

    독립운동 기념터:승동교회

    31독립운동 거사(獨立運動擧事  위해 학생대표(學生代表)들이 모의(謀議)하였던 곳.

    종로72

    종로구

    1993

    손병희선생댁 (孫秉熙先生家)

    손병희(1861~1922) 선생은 구한말의 천도교(天道敎) 지도자이자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에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으며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종로73

    종로구

    2001

    송석원 터(松石園址)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이곳에 정조 때 평민 시인 천수경이 시사(詩社)를 지어 송석원이라 하였고, 1914년 순정황후 윤씨의 백부 윤덕영도 프랑스풍 저택을 짓고 역시 송석원이라 하였다.

    종로74

    종로구

    1995

    송학선 의사 의거 터 (宋學善義士義擧址)

    1926428일 순종의 승하에 울분한 송학선 의사가 금호문(金虎門)앞에서 조선총독을 살해하려던 자리

    종로75

    종로구

    2001

    수진궁 터 壽進宮址

    수진궁은 조선 중기 이후에 어려서 죽은 대군이나 왕자,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나 옹주들의 혼을 모아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그전에는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

    종로76

    종로구

    1993

    수진측량학교 터 (壽進測量學校址)

    개화사상가 유길준(兪吉濬)이 수진궁(壽進宮)을 빌려 측량전문교육기관(1908~1909)을 세웠던 곳.

    종로77

    종로구

    1999

    순화궁 터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 김씨(金在淸의딸)의 사당인 순화궁(順和宮)이 있었던 자리이다.

    종로78

    종로구

    2000

    승문원 터(承文院址)

    조선시대에 외교 문서를 관장하던 관청의 터. 조선 건국 초에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로 설치되었다가 1410(태종10)에 승문원으로 개편되었다. 처음에는 이곳 양덕방(陽德坊)에 있었으나 1443(세종25) 이후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으로 옮겨 다니다가 1787(정조11)에 이르러 다시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종로79

    종로구

    2007

    신간회(新幹會) 본부 터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출범한 신간회가 1929년 이후 본부를 두었던 곳이다.

    종로80

    종로구

    1998

    안동별궁 터(安洞別宮址)

    조선시대 초부터 왕실의 거처였다가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嘉禮)처로 사용되던 궁터

    종로81

    종로구

    1997

    최시형 순교 터 (崔時亨殉敎址)

    동학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독학혁명을 지도하다가 순교(1898)한 터

    종로82

    종로구

    2001

    야주개 터(夜珠峴址)

    야주개는 이곳 신문로 18번지와 20번지 사이 당주동과 신문로1가에 걸쳐 있던 고개다. 야주개는 근처에 있는 경희궁(慶熙宮)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현판 글씨가 캄캄한 밤에도 이 고개까지 빛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야주개는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1899-1931)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종로83

    종로구

    2000

    양현고 터(養賢庫址)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물품 공금을 담당하고 석전제(釋奠祭)의 비용을 조달하던 기관의 터. 세조 때에 철폐되어 풍저창(豊儲倉)에 귀속 되었으나 1483(성종14) 유생들의 상소로 다시 양현고로 환원되어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종로84

    종로구

    1988

    어영청 터(御營廳址)

    인의동 이 언저리는 왕실과 도성의 수비를 맡았던 군영(軍營)

    종로85

    종로구

    2001

    어유구집 터(魚有龜家址)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1675~1740)는 조선 후기의 이름난 문신이자 학자이다. 그는 한성부윤을 지냈던 어윤형의 아들로 숙종 25(1699)에 과거에 합격한 이후 정언, 수원부사, 병조참의, 대사간, 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긍재편록 兢齎編錄>, <농암사단칠정변 農巖四端七情辨>을 저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종로86

    종로구

    2001

    어의궁 터(於義宮址)

    어의궁은 효종이 태어나서 성장하여 왕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어의궁은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며, 인조에 이어 효종까지 임금이 된 궁이라 하여 용흥궁(龍興宮)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낙산 서쪽에 있어서 아침볕을 잘 받는다 하여 조양루(朝陽樓)라고도 하였다.

    종로87

    종로구

    2000

    여단 터(濾祭壇)  

    조선조 정종 2(1400)부터 자손 없이 죽은 사람들의 원혼(怨魂)을 제사 지냈던 단으로 1908년에 폐지 되었다.

    종로88

    종로구

    2005

    여운형 집 터

    몽양 여운형(1886~1947)은 상해에서 19194월 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고, 1936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재직 시 손기정 사진에 일장기를 말소하였으며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활동하다가 암살당하였다.

    종로89

    종로구

    2003

    여인시장 터(女人市場址

    동묘(東廟) 남쪽 마을인 싸전골(米廛洞)에 있었던 채소시장 터.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宋氏)가 궁궐에서 쫓겨나 정업원(淨業院)에 살 적에 이웃 채소 시장의 부녀자들이 송씨를 도와 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시장에는 부녀자들만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여인 시장이라고도 불렸다.

    종로90

    종로구

    2000

    용동궁 터(龍洞宮址)

    조선조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책봉을 받았으나 13세에 세상을 떠나 세자빈의 속궁(屬宮)이 되었다. 조선말 경운궁(현 덕수궁) 부근에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가 독일인 묄렌도르프에 하사되었으며 그 뒤 엄비의 소유로 변하여 숙명여학교가 설립, 운영되었다.

    종로91

    종로구

    1999

    용성스님거주터                龍城      居住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분으로 불교 혁신운동을 펼친 백용성(白龍城, 1864~1940)스님이 활동하던 곳

    종로92

    종로구

    1995

    우포도청 터(右捕盜廳址)

    포도청은 조선시대 도성 안팎의 치안과 순찰을 담당하였던 관청으로서 좌우 포도청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서쪽 지역을 담당하였던 우포도청 자리.

    종로93

    종로구

    2003

    우미관 터(優美館址)

    우미관은 우리 나라에 영화문화가 들어온 초창기인 1912년에 개관되어 단성사(團成社조선극장(朝鮮劇場)과 더불어 사랑받던 영화관이다. 2층 벽돌 건물로 수용 인원 1000명 정도의 큰 극장이었다.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후에는 대체로 오락물을 상영하였다. 이 극장은 광복 이후에도 이곳에 존속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1959년 옛 화신백화점 뒤로 이전하였다.

    종로94

    종로구

    1991

    원각사 터(圓覺社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극장 원각사가 있었던 곳. 1909년 이인직(이인직,1882~1916)의 설중매, 은세계 등이 공연되었음.

    종로95

    종로구

    1999

    육군무관학교 터 (陸軍武官學校址)

    개화기(開化期)에 유능한 청년장교를 양성하던 무관학교 터(1896~1909)

    종로96

    종로구

    1991

    육의전 터(六矣廛址)

    조선시대 비단, 면포, 명주, 종이, 모시, 어물 등 여섯종류의 상품을 팔던 국가공인 상점 거리의 터

    종로97

    종로구

    1999

    이율곡(李栗谷)선생살던집터

    이언저리는 이이(李珥) 이율곡(1536 ~ 1564)선생이 살던 절골 집터 

    종로98

    종로구

    1987

    의금부 터(義禁府址)

    조선조(朝鮮朝) 관리·양반 윤리에 관한 범죄를 담당하던 관아자리

    종로99

    종로구

    2000

    의영고 터(義盈庫址)

    호조에 소속되어 궁중에서 쓰이는 기름, , 채소 등의 물품출납을 맡아 보았던 관청의 터. 1392(태조1)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하였다. 태종대와 세조대의 관제 개편을 통해 직제가 정비되었으며, 1882년에 폐지되었다.

    종로100

    종로구

    1993

    이동녕주석 집터 (李東寧主席家址)

    이곳(봉의동 50)은 임정(臨政)의 이동녕(1869~1940)주석이 1885년 이래 국외로 망명할 때까지 독립협회운동·을사조약 반대 신민회 운동을 폈던 곳.

    종로101

    종로구

    2001

    이문 터(里門址)

    이문은 세조의 명의로 밤사이 마을을 살피기 위해 서울의 주요 골목 입구마다 설치한 일종의 방범초소이다. 주민들이 번갈아 올라가 마을을 살핌으로써 도둑을 막고 화재를 방지하는 등 치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문은 임진왜란 전까지 100여 개소가 있었다.

    종로102

    종로구

    1995

    이상재집터 李商在家址                       Site of Sangjae's House

    이상재(1850~1927)는 한말 및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정치가·사회운동가이다.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구성하여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1927년에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좌·우익이 합작하여 만든 사회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초대회장이 되었다.

    종로103

    종로구

    2001

    이상집 터(李箱家志)

    이상(1910~1937)은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1930년대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이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풍기면서 인간의 모순됨을 유희와 역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난해시 '오감도'는 독자들의 항의 때문에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종로104

    종로구

    2000

    이현궁 터(梨峴宮址)

    조선조 광해군의 궁궐이 있던 터. 인조 이후에는 왕실의 거처로 사용하다가 군사시설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으며, 1908년에 이를 폐지하고 훈련도감에 귀속시켰다. 이 부근의 지명을 배오개(梨峴)라고 부른다.

    종로105

    종로구

    2001

    자수궁 터(慈壽宮址)

    자수궁은 조선조 광해군 때에 세운 궁궐이다. 조선 건국 초에는 북학이라는 학당이 이곳에 서 있었으나 광해군 8(1616) 경희궁 일대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풍수설이 나돌아 광해군이 이 기운을 차단할 목적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종로106

    종로구

    1994

    자주동 샘(紫芝洞泉)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있는 샘

    종로107

    종로구

    2001

    장예원 터( 掌隸院址)

    장예원은 조선시대 공사(公私) 노비 문서를 관리하고 노비 소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장예원은 육조의 하나인 형조 아래에 설치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신분제 해체 현상으로 업무가 축소되다가 영조40(1764)에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

    종로108

    종로구

    2001

    장원서 터(掌苑署址)

    궁궐의 후원과 각지의 과수원을 관리하고 궁중과 여러 관아에 과일과 화초 등을 공급하던 관아 터 

    종로109

    종로구

    2001

    장흥고 터(長興庫址)

    장흥고는 조선시대 때 궁궐 안이나 궁궐 내 관공서에서 쓰이는 물품을 보관하거나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장흥고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태조 때에 설치되었는데, 본래는 중구 회현동에 위치했다가 나중에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종로110

    종로구

    1997

    전옥서 터(典獄署址)

    조선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한말 항일의병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곳

    종로111

    종로구

    1992

    전의감 터(典醫監址)

    조선시대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재배하던 관아 터. 조선말에 우정총국(郵征總局)이 들어섰다

    종로112

    종로구

    2005

    전차 차고(電車車庫)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전차 종점으로 차고가 있던 곳. 또한 종로행이나 청량리 행 손님이 전차를 갈아타기도 하였다.

    종로113

    종로구

    1992

    정도전집 터(鄭道傳家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집 터. 후일 사복시(司僕寺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에는 수송국민학교(壽松國民學校)가 세워졌었다.

    종로114

    종로구

    1988

    정철 선생 나신 곳 鄭澈 主家址

    이 언저리 장의동(壯義洞)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松江) 정철 선생(1536~1593)이 태어난 곳

    종로115

    종로구

    1990

    제생원 터(濟生院址)

    조선초의 서민 의료기관 터. 극빈자의 치료와 미아의 보호를 맡았으나 세조때 혜민서에 병합되었다. 조선조말엽 이 터에 계동궁(桂洞宮)이 들어섰다

    종로116

    종로구

    2000

    제용감 터(濟用監址)

    조선시대 궁중의 모시, 마포 등 옷감의 직조와 의복의 제조·공급을 담당하던 관청인 제용감(濟用監)

    종로117

    종로구

    1987

    조광조(趙光祖)선생 살던 집 터

    정암(靜庵)조광조(1482-1519) 선생이 살던 한양골 집터(돈의동)

    종로118

    종로구

    2002

    조선건국동맹 터

    조선건국동맹은 1944810일 조국의 광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자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중심인물은 여운형, 조동호,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등이며, 산하조직으로 조선농민동맹을 두었다.

    종로119

    종로구

    2007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조선어학회는 1921년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종로120

    종로구

    2005

    조선일보 창간 사옥터         朝鮮日報創刊 社屋址  

    192035일 창간한 조선일보사 사옥 터. 조선일보는 3·1운동 이후 민족 자본으로 이곳에서 창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로121

    종로구

    1987

    조지서 터 造紙署址  

    조지서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관아로서 1415년 태종때 조지소(造紙所)란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6년 세조때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국가문서에 쓰이는 표전지(表錢紙), 지폐 용지인 저화지(楮貨紙)와 기타 서적 제작용 종이를 생산하였다.

    종로122

    종로구

    1999

    종부시 터(宗簿寺址)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를 편찬하고 종실(宗室)을 관리하던 관청인 종부시(宗簿寺)가 있었던 자리

    종로123

    종로구

    2001

    종친부 터(宗親府址)

    종친부는 조선조 왕의 친족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던 부서이다. 고려 이래 종친은 작위와 녹봉만 받을 뿐 관직을 맡을 수 없었으므로, 일반 관직체계와는 별도로 종친을 관리하기 위해 종친부가 설치되었다. 종친부는 역대 왕의 계보와 초상을 모시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는 기능도 담당하였다.

    종로124

    종로구

    1998

    종침교 터(琮琛橋址)

    조선조 성종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許琮)과 허침(許琛)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터

    종로125

    종로구

    1995

    좌포도청 터  左捕盜廳址

    조선시대 정선방(貞善坊)에 있던 죄인을 다스리던 관청 터

    종로126

    종로구

    2001

    죽동궁 터(竹洞宮址)

    죽동궁은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와 그 남편 김현근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곳은 당시 김현근이 앓고 있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당들이 대나무 칼춤을 추며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으로 불리다가, 후에 죽동궁이 되었다. 고종 때에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살기도 하였다.

    종로127

    종로구

    2001

    준천사 터(濬川司址)

    준천사는 조선시대에 도성 안의 청계천을 관리하고 서울 주변 산의 나무를 보호하는 일을 맡았던 관청이다. 준천사는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높아지면서 청계천이 자주 범람하자, 이를 막기 위해 영조 36(1760)에 대대적으로 하천 바닥을 파내는 작업을 한 이후에 상설되었다.

    종로128

    종로구

    1989

    중학당 터(中學堂址)

    이곳 북부 관광방(北部 觀光坊)에 있던 조선시대 한성 4부학당의 하나인 중학당 터

    종로129

    종로구

    1988

    지석영 집 터 池錫永家址

    종두법 보급과 서양 의학 도입, 국문(國文)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의 집 터.

    종로130

    종로구

    1995

    지청천 장군집 터 (池靑天將軍家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투사 지청천장군의 집 터

    종로131

    종로구

    1995

    진단학회 창립터 (震檀學會 創立 址)

    한국역사 및 문화를 연구하기 위하여 193457일 창립한 진단학회 사무소가 1936년 초 성북동으로 옮겨갈때까지 있던 자리.

    종로132

    종로구

    1999

    창의궁 터(彰義宮址)

    조선시대 영조의 잠저(潛邸)였던 궁터로 천연기념물 백송(白松)이 있었던 곳

    종로133

    종로구

    1990

    척화비(斥和碑) 있던 곳

    19세기 후반 고종의 생부(生父)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서양인의 조선침투를 방어 격퇴시켰다는 의미로 전국 주요지역에 세웠는 바 그중의 한 척화비가 있었던 곳.

    종로134

    종로구

    1998

    청송당 터(聽松堂址)

    조선시대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 대학자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 두문불출하면서 공부했던 독서당 터

    종로135

    종로구

    2002

    총융청 터(摠戎廳址)

    총융청은 인조2(1624)에 설치된 조선시대의 중앙 군영(軍營)이다. 광주(廣州양주(楊州수원(水原) 등 경기도 지역의 군사 일을 맡았으며, 영조 23(1747)에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수비를 맡기도 했다. 고종21(1884)에 폐지되었다.

    종로136

    종로구

    2002

    앙부일구(해시계) (仰釜日咎臺址)

    앙부일구(해시계)는 조선 초에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제작한 최초의 공중시계이다. 광무 2(1898)에 전차 궤도를 부설할 때 파묻혔던 앙부일구받침대는 1930년에 발견되어 탑골공원으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종로137

    종로구

    2002

    충훈부 터(忠勳府址)

    충훈부는 국가에 공훈이 있는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처음에는 공신도감, 충훈사로 부르던 것을 1459년 세조 때 충훈부로 고쳤다. 6·25전쟁 때 대부분 파손되었으며, 1953년 보신각을 복원할 때 그 기와 일부를 사용하였다.

    종로138

    종로구

    2001

    취운정 터(聚雲亭址)

    1870년대 중반 민태호(閔台鎬, 1834~1884)가 지은 정자 터이다. 취운정은 유폐된 유길준(兪吉濬, 1856~1914)서유견문을 집필한 곳이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회합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종로139

    종로구

    2002

    탕춘대 터(蕩春臺址)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이다. 연산군은 경치가 좋은 이곳 일대를 연회장소로 삼고 시냇물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위에 탕춘대를 지었다. 영조 때에는 이 일대에서 무사들을 선발하여 훈련시켰다고 하여 연융대(鍊戎臺)라 부르기도 하였다.

    종로140

    종로구

    2001

    통례원 터(通禮院址)

    통례원은 조정의 의례와 하례, 제사와 의식 때 안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태조 원년(1392)에 각문(閣門)이라 하였다가 곧 통례문이라 고쳐 불렀고, 1414년에 통례원으로 다시 고쳐서 유지하다가 1896년에 폐지하였다. 통례원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로141

    종로구

    1994

    평창 터(平倉址)

    조선후기 서울 북쪽의 방어를 위한 총융청(摠戎廳)의 군량창고가 있던 곳

    종로142

    종로구

    2001

    한성도서주식회사 터

    한성도서주식회사(대표이사: 이봉하  이사: 이종준, 한규상, 박태련, 장도빈)는 민족문화를 지키고 계승하는 데 크게 기여한 출판사로서 1920년에 창설되어 1957년까지 존속하였다. 주요 출판물로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심훈의 <상록수> 등이 있다.

    종로143

    종로구

    1998

    한성부 동부 관아 터 (漢城府東部官衙址)

    조선시대 5백여년간 서울 동쪽지역의 주민행정을 담당하던 관아 터

    종로144

    종로구

    1998

    한성부 북부 관아 터 (漢城府北部官衙址)

    조선시대 5백여년간 서울 북쪽지역의 주민행정을 담당하던 관아 터

    종로145

    종로구

    1998

    한성부 중부 관아 터 (漢城府中部官衙址)

    조선시대 5백여년간 서울 중부지역의 주민행정을 담당하던 관아 터

    종로146

    종로구

    1991

    한성정부유적지    (“漢城政府遺跡地)

    1919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기로 하고, 그 취지서를 준비한 곳

    종로147

    종로구

    2003

    한성전보총국 터(漢城電報總局 址)

    이 곳은 조선 고종 22(1885) 조청전선조약(朝淸電線條約)을 체결한 후 조선과 청과의 사이를 연결한 서로전선(西路電線)을 운영하기 위해서 세운 한성전보총국이 있었던 자리이다.

    종로148

    종로구

    2006

    한양의원 터                    漢陽醫院址                           

    우리나라 근대 초창기의 양의로 한성의사회 회장과 조선의사협회 초대 간사장을 역임한 박계양(朴啓陽)이 운영하던 병원터. 홍명희, 정인보, 최남선과 같은 명사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종로149

    종로구

    2001

    현진건집 터(玄鎭健家址)

    현진건(1900-1943)은 근대 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친일 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종로150

    종로구

    1998

    혜정교 터(惠政橋址)

    중학천(中學川) 위에 놓였던 다리로 복청교(福淸橋)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도 하였음

    종로151

    종로구

    1985

    홍화문 터(弘化門址)

    서울의 동소문(東小門)으로 태조(太祖) 5(1396) 세우다. 중종(中宗)때 혜화문(惠化門)으로 고쳤고 일제(日帝)에 의하여 1939년 기단(基壇)이 철거되었다.

    종로152

    종로구

    2000

    화기도감 터(火器都監址)

    조선시대에 총포를 만들었던 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총(鳥銃)을 사용하여 아군이 크게 고전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총청(鳥銃廳)을 만들어 총포를 제작하였고, 그 후 북쪽의 여진(女眞)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하였다.

    종로153

    종로구

    2005

    황성신문 터                    皇城新聞址 

    황성신문은 1898년 남궁억 등이 창간한 국한문 혼용의 애국계몽 일간지로서 국권을 수호하고 국민을 계몽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이'시일야방성대곡'이란 통분 논설을 게재하였다가 정간 당하였다.

    종로154

    종로구

    1992

    훈련도감 터(訓鍊都監址)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포수(砲手), 사수(射手), 살수(殺手)의 삼수병(三手兵)을 관할하던 군영 터

    종로155

    종로구

    2005

    흥덕사 터

    이 부근은 조선 태조가 태종1(1401)에 옛집 일대를 희사해서 흥덕사를 창건한 곳이다. 그 후 세종때 불교를 선교(禪敎) 두 종파로 통폐합 할 때 교종의 도회소가 되는 등 불교사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연산군 때 폐사된 후 흔적조차 없어졌다.

    종로156

    종로구

    1988

    흥화문 터  興化門址

    경희궁(慶熙宮) 정문인 흥화문의 원래 자리

    종로157

    종로구

    2008

    옥호정 터

    순조의 장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제택 (第宅)인 옥호정이 있던 곳이다. 전해오는 옥호정도(玉壺亭圖)’에 그려진 일관석(日觀石)’ 각자(刻字)바위가 현재 북악 동쪽 산 중턱에 남아 있다

    종로158

    종로구

    2011

    신흥 대학 터(新興大學  )

    일제 강점기 서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이 1949320일 정식 대학으로 인가받아 개교한 자리. 신흥대학은 1955년 회기동으로 이전하여 1960년 경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종로159

    종로구

    2011

    한국 천주교회 창립(韓國 天主敎會 創立)

    1784(정조 8)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李檗, 1754~1785)의 집이던 이곳이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터이다

    종로160

    종로구

    1990

     제중원 터(濟衆院址

    제중원은 1885(고종 22)년 알렌(Allen)의 제의에 따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에 설립된 서양식 병원이다. 처음에는 광혜원(廣惠院)으로 이름 붙였다가 취소하고 제중원으로 하였다. 2년 뒤에 구리개(銅峴)로 옮겼다. 제중원 건물은 홍영식(洪英植)의 집이었다.

    종로161

    종로구

    2011

    송진우 집 터 (宋鎭禹家址)

    일제 강점기 중앙학교 교장, 동아일보 사장 등을 지내고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를 맡았던 고하(高下) 송진우(1889~1945)1920년대부터 살던 집 터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