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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표석](종로51)북평관 터(北平館址)
    여행등산/기념표석답사 2014. 12. 1. 10:00

     

    표 석 명

    북평관 터(北平館址)

    임시관리번호

    종로51

    설치연도

    1988

    표석문안

    이 언저리 동부 흥성방(東部 興盛坊)은 여진(女眞) 사신을 유숙시켰던 집 터

    표석위치(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6가70-3

    찾아가는 길

    지하철4호선 10번출구-->한양도성박물관 방향 100m 버스정류장 앞

    관계되는 내용

    북평관(北平館)

     

    조선시대 한성부에 여진족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만든 국영의 객관(客館).
    원래 야인관(野人館)이라 부르던 것을 1438년(세종 20)에 북평관으로 고쳤으며, 동대문 근처에 위치하였는데 조선 중기에 없어졌다. 조선은 여진에 대해 일본과 같이 교린정책(交隣政策)을 쓰는 한편, 무력행사를 취하기도 하였다.
    교린정책으로는 경성·경원에 무역소(貿易所)를 두어 당시 반농반수렵생활(半農半狩獵生活)을 하던 그들에게 생활필수품인 면포(綿布)·마포(麻布)·저포(苧布)·미두(米豆)·염장(鹽醬)·농구(農具)·종이 등을 마필(馬匹)·해동청(海東靑)·산삼(山蔘) 및 각종 모피(毛皮) 등을 가지고 와 바꾸어가도록 하였다.
    또 조선에서는 그들에게 조공과 귀화를 장려하는 한편, 여진 추장들에게 지중추원사 이하 호군(護軍)·사직(司直)·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명예군직을 주기도 하고, 서울에는 북평관을 두어 내조(來朝)하는 여진인들을 유숙하게 하였으며, 이들이 토산물을 진상하면 그에 대한 회사물(回賜物)을 주어보냈다.
    한편, 명나라는 이와 같은 조선의 정책을 반대하여 조선에서는 건주위(建州衛)와의 정식교통을 끊고 때때로 만포진에서 여진인의 요구에 따라 약간의 식료품만을 주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북평관 터(北平館址) 표석 

     ▼ 북평관 터(北平館址) 표석...한양도성박물관 앞에 위치 

    ▼ 북평관 터(北平館址) 표석  

    ▼ 북평관 터(北平館址) 표석... 동대문 옆이다.  

     ▼ 북평관 터(北平館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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