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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봉산 오르면서 봐야할 문화재와 표석들...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5. 3. 8. 13:52

    도봉산을 수없이 오르는 사람도 관심이 없는 분야는 무관심해진다.

    어제 시산제를 위해 도봉산을 오르면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하며 오르다보니

    지난 겨울에 풍수학인들과 함께한 문화답사가 생각나 사진을 몇 장 찍어왔다.

    지난 겨울에 올린 글과 대비하면서 보면 좋을듯 싶어서 올려본다.

     

      서울 창포원(菖蒲園)

     

    서울 창포원은 도봉구의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조성된 식물원으로, 도심 속의 아름다운 녹색 공간으로 건설되었다. 200611월에 서울 창포원 조성 사업이 시작되어 200967일에 개장하였다.

    세계 4대 꽃 중 하나로 꼽히는 붓꽃[iris]이 가득한 특수 식물원인 서울 창포원은 약 52417에 붓꽃원, 약용 식물원, 습지원 등 12개 테마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붓꽃원에는 노랑꽃창포, 부처붓꽃, 타레붓꽃, 범부채 등 모양의 꽃봉오리를 가진 붓꽃류 130여 종이 30만 본 심어져 있어 붓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약용 식물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용 식물의 대부분을 한자리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습지원에서는 각종 수생 식물과 습지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관찰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이밖에도 지피 식물원, 허브원, 산림 생태 관찰원, 방문자 센터 등이 조성되어 있다.

     

    ▼ 서울창포원...

    ▼ 서울창포원... 지하철7호선 도봉산역에 내리면 바로 보인다. 그런데 관심이 없으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안보인다.ㅎ  

     

    누원점(樓院店): 다락원 터

     

    도봉산 입구 자연마을인 안골이 있는데 이곳을 다락원이라 부른다. 다락원은 한자로 표기하면 누원(樓院)이 되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18세기 후반 사상도고(대규모 민간 도매상)들이 커다란 장시를 이루어 도성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던 중요한 거점이었다. 특히, 누원점(樓院店) 은 서울로 오는 곡식과 옷감 등을 나르는 길목으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물건을 사고 팔거나 상인들과 연결이 쉬어 상인들의 활동 중심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의 번성했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이곳이 과거의 누원점 터였음을 알려주는 조그만 표지만이 있을 뿐이다.

     

    ▼ 도봉산역 건너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다락원 표석... 잘 눈에 띄지 않는다.

     

     ▼ 천축사 가는 길 시비...

     

    목필균 시인이 직접 쓴 '천축사 가는 길' 시비에 대한 글

    천축사 가는 길
     

    먼 산빛을 친구 삼아
    도봉산에 오르면
    천축사 가는 길은 열려 있다.

     

    젊은 까치 소리에 눈웃음 치고
    이름 모를 풀꽃에도 손길을 주며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걸으면
    노래하듯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가
    오히려 내 갈 길을 재촉하니 재미있다.

     

    도봉산을 품어 안은
    천축사의 끝없는 도량을 향해
    일상의 상념들을 날려 보내면
    근심은 바람 되어 맴돌다 사라진다. 

     

    티끌 같은 몸뚱이에 자리 잡은
    바위만한 욕심덩이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되돌아보는 시간.
    천축사 가는 길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하다.

     

    목필균 시, 강정화 증 


    이 시는 천축사 원타 스님께서 신도 강정화님의 도움으로 도봉산 입구에 시비(詩碑)로 세워진 시이다. 세워진 때는 1997년 12월인데, 동료 시인에 의해 글쓴이가 안 것은 다음 해 3월이었다.
    세상은 뜻하지 않은 일들이 매복되어 있어서 인생을 굴곡 있게 전개시키는 것인가 본다. 매복된 일들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로 인해 상심하고 기뻐하는 일들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시비(詩碑)로 인해 처음에는 기쁨으로 놀라고, 그 다음에는 가슴에 부끄러운 가시로 남아있다.
    벌써 7년 전인가보다. 42세가 되어서야 겨우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된 내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든 소식은 시비가 세워진 일이다. 이는 내 자신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우이시낭송회에서 산을 잘 다니는 어느 시인이 흥분된 목소리로 목필균 시인의 커다란 시비가 도봉산 입구에 세워졌다고 시낭송 차례에 알려주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다.
    무슨 말인가? 내 시가 시비로 세워지다니. 마침 그 자리에 당시의 도봉구청장 이었던 유천수님이 와 계셨다. 정말 너무나 엄청난 소식에 당혹해 하는 내게 그 분은 문화홍보과장을 보내 해명을 해 주셨다. 

     

    제 1회 도봉산 축제 때 우이시인들이 초청을 받아 시낭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시를 원고로 보내고 시낭송을 했고, 구청장은 그 시가 마음에 들어 천축사 주지스님이셨던 원타스님께 시비로 세울 것을 의논하셨다고 한다. 원타스님은 그 때 병마에 시달린 몸과 절망적인 마음으로 가끔씩 천축사를 찾던 나를 잘 알고 계셨다. 더구나 그분이 발행하시던 ‘천축지’에도 발표했던 그 시에 대해 알고 계셨으므로 도봉구청장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도봉구청에서는 지금은 주차장 자리에 시비를 세울 자리를 마련해 주기로 했고, 천축사에서는 시비를 세우는 일체의 경비를 책임지기로 했다는 밀약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왜 난 전혀 몰랐을까? 

     

    당시 천축사 주지 원타스님은 매우 진취적인 성향의 젊은 스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창동역 근처에 포교원까지 마련하시고 중생들 제도에 적극 나선 때였다. 그 때가 초창기라 무척 바쁜 상황이었고, 길게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시비 건립의 일들이 단독 보시를 하겠다고 나선 강정화불자님을 만나서 일의 진척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상 시비가 세워진 시점에 급작스레 부산 부암사로 떠나시게 된 것이다. 시비 건립이 완성되면 내게 연락을 하겠다고 하셨는데, 게으른 내가 천축사를 찾지 않았고, 그 시기를 놓친 결과이다. 

     

    결국 나는 놀라움, 기쁨, 민망함으로 범벅이 된 심정으로 시비를 확인하게 되었고, 친구들 몇이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돌아보니 세상에 이렇게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 문단에 얼굴도 제대로 내밀지 못한 내가 거대한 돌덩이에 이름 석자가 박히고, 그리 잘 쓴 시도 아닌데 도봉산 입구에 버젓이 서 있을 수 있을까? 기라성 같은 원로시인님께는 민망하여 뵐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시비를 확인하고 며칠도 못되어서 친척들에게까지 함구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난 친정 식구들에게까지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문단에 들어와서 유일하게 몸담고 있는 우이시 어른들은 물론 동료시인들께도 이 시비에 대한 이야기는 내 입으로 올려보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지내온 4년이 지나서야 먼저 우이시 회장님께서 공식적인 행사 때 언급해 주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비가 그리 영광스럽지는 못하다. 지금 쓴다면 좀 더 깊이 있는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목필균, 그 건방진 놈, 아니 돈이 얼마나 많기에 자기 돈으로 시비를 세워!!!” 하며 시비(是非)를 거는 사람도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이름이 남자 같고, 전혀도 무명하였기에 받은 오해이며, 너무나 거대한 돌에 새겨진 것이 화근이었지만 난들 어떻게 할 것인가?


    늘 민망해 하는 나를 평소에 아껴주시던 박희진 시인께서 어느 날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 시비에 적힌 목시인의 시는 평범한 작품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던져주신 메시지가 크다. 그래서 그 시비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말씀에 오랫동안 민망함에 쳐진 어깨를 추슬렀다. 

    도봉산 입구에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난 소박한 불심을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나 어려운 때 위로 받았던 천축사 가는 길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쓴 시가 시비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나도 이젠 이 민망함에서 벗어나고 싶다.

     

     

    ▼ 도봉산 입구에는 도봉산의 영봉들의 자태를 축소하여 그 모양을 세워 놓았다.

     

    ■6 유희경 이매창 시비(劉希慶 李梅窓 詩碑)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1545~1636]은 비록 하층민이었지만 양주 목사로서 도봉 서원을 건립한 남언경(南彦經)에게서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국상(國喪)에 자문할 정도로 예()에 밝았으며 도봉 서원(道峯書院) 설립에도 간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공로 등을 인정받아 품계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에까지 올랐다.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을 남겼다.

     

    이매창(李梅窓)[1573~1610]은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 기생으로 황진이(黃眞伊),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힌다. 이름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 혹은 계랑으로 썼다. 시와 가야금에 능하였으며 유희경과의 사랑으로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라는 명시를 남겼다. 뒷사람들이 매창집(梅窓集)을 묶었다. 전라북도 변산 반도의 개암사(開巖寺)에 그 목판이 전한다.

     

    유희경과 이매창이 생전 서로를 그리워하며 주고받은 대표적인 시를 새겨 넣었다.

     

    낭가재낭주(娘家在浪州)[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아가주경구(我家住京口)[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상사불상견(相思不相見)[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장단오동우(腸斷梧桐雨)[오동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유희경, 이매창의 시비... 만남의 상징처럼 서로 그리워한 마음을 조각으로 잘 표현하였다.

    ▼ 유희경, 이매창의 시비 안내문...

     ▼ 눈이 녹은 뒤의 유희경, 이매창의 시비

     

    ▼ 북한산 국립공원 간판.

     

    우암 송시열(1607~1689) 도봉동문(道峯洞門) 각자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요, 정암 조광조의 학통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이어받았다.

    송시열은 일찍이 조선 성리학 도통의 시작인 조광조를 사모하여 그가 제향된 도봉 서원을 즐겨 찾아 글씨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현재 도봉 서원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이 많았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등 다수가 간행되었으며, 사후(死後)의 문집으로는 우암집,송자대전등이 출간되었다.

     

    ▼ 도봉동문(道峰洞門) 각자 바위와 북한산국립공원 표지석  

     

     ▼ 도봉동문(道峰洞門) 각자 바위

     

    신정 왕후 별장 터(神貞 王后 別莊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401번지에 있는 광륜사(光輪寺)라는 절은 원래 신정 왕후[1808~1890], 곧 조대비(趙大妃)의 별장 터이다. 신정 왕후는 순조(純祖)의 며느리이자 효명 세자의 부인으로 헌종(憲宗)을 낳았다. 1857(철종 8) 순조(純祖)의 비인 순원 왕후(純元王后)가 죽자, 신정 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었고,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後嗣) 없이 승하하자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정 왕후는 고종 즉위 후 1866(고종 3)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46(헌종 12) 아버지인 영돈령부사 조만영이 죽은 뒤, 신정 왕후는 현재의 도봉동인 도봉산 입구에 별장을 지었다. 도봉산은 산수가 수려하여 별장 터로 적격이었을 것이다.

    고종 대에는 신정 왕후의 별장에서 흥선 대원군이 휴식을 취하며 국정을 보기도 하였다. 또한 6·25 전쟁 중에 미군의 숙소로 이용되었고, 1980년 훼손되기 전까지 영화 촬영장으로 많이 활용되었다고 한다. 신정 왕후 별장은 이후 매각된 뒤 헐리었고 별장 터에 금득사라는 개인 사찰이 설립되었다. 2001년에 성륜 문화 재단에서 금득사를 인수하여 중창 불사를 하였고, 2002년에 광륜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현재 광륜사의 대웅전 등 전각 대부분은 금득사 때 그대로라고 한다.

    신정 왕후 별장 터에 들어선 광륜사의 삼성각에는 신정 왕후의 초상과 영가(靈駕)를 두어 신정 왕후와 광륜사의 인연을 보여 주고 있다.

     

    ▼ 도봉산 광륜사는 신정왕후의 별장지에 세워진 절이다.

    ▼ 도봉산 광륜사 삼성각에는 신정왕후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 신정왕후 초상

    ▼ 도봉산 광륜사 관음상은 특이하게 아이를 안고 있다.

     

    ▼ 도봉서원터 앞에는 가람 이병주 선생의 북한산찬가가 세겨져 있다.

     

    도봉서원과 각석군(서울시 기념물 제28)

    도봉서원은 1573(선조 6)1574(선조 7)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조선 중종 때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배경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사당 등을 세워 조광조를 모시고 기린 데서 출발해 1696(숙종 22)부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위패까지 함께 모시던 서원으로 도봉산 입구 등산길로 오르면 우측 옛 영국사 터에 위치해 있다. 1775(영조51) 어필사액을 다시 받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400여 년간 양주, 파주, 포천, 서울지역에 있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도봉서원이 1871년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단을 설치하여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 오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으나 1970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1971년 복원하여 매년 음력 310(춘향제)910(추향제)에 전국 유림 및 지역유지가 모여 전통향사를 지내고 있다.

     

    <연합뉴스보도>

    금강령·금강저·향로·발우 등 66건 77점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들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한 서울 도봉구 도봉서원 터에서 고려시대 각종 불교의식이나 공양에 사용한 금강령·금강저·향로·발우 등 66건 77점에 달하는 국보 혹은 보물급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문화재청과 발굴조사단인 서울문화유산연구원(원장 김일규)은 지난 2012년 도봉서원터 발굴조사 결과 수습한 이들 불교용구 관련 유물 일체를 21일 오전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공개했다.  
    연구원은 서울특별시기념물 28호인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 복원정비 계획에 따라 2012년 5~9월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도봉서원이 조선 초기까지 존재한 사실이 확인되는 영국사(寧國寺)라는 사찰터에 건립된 사실을 확인했다.

     

    ▼ 도봉서원터는 발굴조사를 했었는데 마지막에 유물이 대거 발견되어 지금도 공사 중이다. 언제까지 이대로 방치할건지... 

    ▼ 도봉서원터 앞에 있는 계곡은 많은 각자들이 새겨져 있다...  

    ▼ 곡운 김수증이 쓴 고산앙지 각자... 

     

      김수영(1921~1968) 시비

     

    종로 관철동 58-1에서 태어났으며 효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동경상대전문부에 입학 1943년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1952년까지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김수영 시인은 1954년 가족과 재회한 후 창동으로 이사하여 1956년 마포 구수동으로 분가한 이후에도 어머니와 도봉동 본가에서 양계를 하는 등 수시로 도봉동 본가를 찾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재 그가 태어난 관철동 집, 어린시절 살았던 종로6가집, 구수동집 등은 재개발로 남아있는 곳이 한 곳도 없으며, 도봉동 본가만이 시인의 체취를 맡아 볼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다.

    김수영은 치열한 저항정신과 새로운 형식으로 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이며,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활약한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이다. 그의 시와 문학적인 표현들은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 가치를 갖게 되었으며 자유는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시19686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그의 마지막 작품(1968.5.29.)이자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대표시로 달나라의 장난(1959년 간행), 거대한 뿌리(1974년 간행) 등 시집과 평론집 시여 침을 뱉아라(1975년 간행), 기타 번역서 등이 있다. 19816김수영 시선출간(지식산업사), 9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전집 2-산문출간(민음사). 전집 출간을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고 김수영이 태어난 날인 1127일에 제1<김수영 문학상> 시상식을 하였다. 20019월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1020<금관 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도봉산 도봉서원 아래쪽인 도봉동 산 107번지에 김수영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시비 앞면에는 대표시 이 새겨져 있다(아래 사진). 20131127일 구() 방학3동 문화센터 자리(해등로8230)에 김수영문학관이 개관하였다.

     

    ▼ 김수영 시비... 새겨진 '풀' 시는 돌아가시기 몇 일 전에 쓴 작품이다.

    ▼ 눈 녹은 뒤의 김수영 시비... 김수영의 묘는 도봉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시비 밑에 유골을 묻었다 한다.

     ▼ 방학동에 위치한 김수영 문학관...

     ▼ 김수영 문학관 외형과 문학관내에 전시된 김수영 초상조각...

    ▼ 김수영 문학관에 전시된 詩 '풀' 전문...  

     ▼ 금강암 입구에 있는 복호동천(伏虎洞天) 각자...

    ▼ 문사동(問師洞) 각자...  

     ▼ 문사동(問師洞) 각자 안내문...  

     ▼ 문사동(問師洞) 각자가 위치한 계곡 전경... 지금도 이 자리는 우이암 등산 시 반드시 쉬어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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