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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성대(강감찬장군 사당)
    답사는 즐거워/문화재답사 2016. 2. 8. 09:00


    낙성대-강감찬(姜邯贊)장군 사당

     

    낙성대를 여러번 다녀왔지만 제대로 기록으로 남기지 못해 다시한번 올린다. 이번에 서울둘레길을 걸으며 들렀다 왔었는데 그 이후 다시한번 시내답사 코스를 개발하기 위해 다른 문화재들과 함께 또한번 다녀왔다.

    낙성대 인근은 현재 한창 고속도로 공사가 시끄럽다. 낙성대공원도 확장을 하는지 주위가 아주 시끄럽다.

    연휴가 끝나고 찾은 낙성대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먼저 낙성대탄생지유허비를 찾았는데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듯 보인다. 주택가 한 복판을 그래도 탄생지로 남겨놓은 정성이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낙성대에 올라서 향을 피우고 장군의 영정 앞에 잠시 머물며 명복을 빌었다. 빨리 이곳의 공사가 끝나 경건한 장소가 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강감찬(姜邯贊)장군

     

    948년(정종 3)∼1031년(현종 22).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금주(衿州). 초명은 은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강궁진(姜弓珍)이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국자재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18년(현종 9) 경관직(京官職)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外官職)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고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 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대장군(上元帥大將軍)이 되어 부원수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이때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安州)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정예기병 1만 2,000천명을 산기슭에 잠복·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 현재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현재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다. 특히 구주(龜州)에서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거란군은 애초 10만의 병력 가운데 고작 수천에 불과한 인원들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의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강감찬을 극진히 환영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었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또한 그는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해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강감찬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호

    문화재명칭

    낙성대(落星垈)

    소재지

    서울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

    관리자(연락처)

    서울특별시

     

     강감찬장군 탄생지 낙성대 유허비

     강감찬 탄생지에 있는 기존 향나무는 고사하여 새로운 향나무로 재이식했다한다.

     낙성대 입구에 있는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 홍살문과 안국문

     낙성대 표지석... 박정희대통령 글씨


     낙성대 입구


     낙성대 공원안내도

     낙성대 안내문

     낙성대 홍살문... 뒤에서 본 모습

     낙성대 외삼문인 안국문

     낙성대 강감찬장군 사적비 

     낙성대 삼층석탑


     강감찬장군 탄생지에 새워졌던 삼층석탑... 탑신에 강감찬 낙성대라 새겨져 있다.

     낙성대 내삼문


     낙성대 안국사... 강감찬 장군 초상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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