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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광주]맹사성선생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8. 8. 26. 09:00


    맹사성 선생 묘


    맹사성선생 묘는 여러번 다녀온 곳이지만 글을 올린 것은 예전에 비오는 날 찾아보고 올린게 있다. 이번에는 날씨가 좋긴 했지만 너무나 더워 서있기조차 힘든 날이어서 사진도 별로 없고 또한 묘역 벌초를 하지 않아 배위 묘소는 엉망이다. 

    이곳은 산이 묘역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모양으로 빈틈이 전혀 없는 국세를 자랑한다. 흔히 화심형이라고 하는데 꽃속의 암술이 있는 위치라고 표현한다. 이곳이 이렇게 넓게 보존이 가능한 것은 이 산 전체가 맹산으로 맹씨들의 산이기 때문이다. 지금 광주지역은 한창 개발이 진행되서 왠만한 야산들은 모조리 택지, 전원주택지로 탈바꿈하는데 이곳은 광주안에서 십승지처럼 움푹 들어간 곳에 잘 보존되고 있다. 내 바람이지만 후손들이 이 땅을 팔지않고도 넉넉하게 조상을 모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되리라고 본다.

    배위 묘는 수구처 근방에 위치하고 있는데 어떤 분은 이 묘가 더 좋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 어느 가문이 크게 발복하는데는 하나의 묘만 잘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기운들이 후손에게 좋은 기운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 묘도 단정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썩 나쁘지는 않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맹사성 선생 묘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고불(古佛). 온양 출신.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맹희도(孟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녀사위(孫婿)이다.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다.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기거랑(起居郎)·사인(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동부대언(同副代言)·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조대림(趙大臨: 태종의 딸 慶貞公主의 夫君)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맹사성이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풍해도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그 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고 142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이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맹사성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며,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신중함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는 맹씨 문중의 산인 맹산(孟山)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한 장방형(長方形)의 호석(護石)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봉분 조성 방법으로 조선 초기까지 계속된 양식이다.

    봉분 앞에는 1438년(세종 20)에 건립된 조선 초기 양식의 화관석(花冠石) 묘비가 세워져 있다. 봉분과 묘역이 다소 협소한 감이 있으며 사성(莎城)은 묘에 비하여 높은 편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 그 앞에는 근래에 새로 제작한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다.

    그리고 새로운 향로석 우측에는 원래의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봉분 우측에는 후손들에 의해 1959년 제작된 새로운 묘비가 있다. 묘역 앞의 좌우로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고, 1968년에 새로 제작된 망주석(望柱石)과 동자상(童子像)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한편 묘소 우측 500m쯤에는 흑기총(黑麒塚)이 있는데, 이것은 맹사성이 즐겨 탔던 검은 소의 무덤으로 그가 죽자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경기도 기념물 제21호

    문화재명칭

    맹사성 선생 묘

    소재지

    경기 광주시 직동 산27(네비주소:경기 광주시 직동 321 주차후 도보)

    관리자(연락처)

    신창맹씨 종중

     

    맹사성 선생 묘 안내판

    맹사성 선생 묘 입구에서 바라본 현무정...

    맹사성 선생 묘 입구 안내문

    맹사성 선생과 함께 했다는 검은소 무덤 흑기총 안내문

    맹사성 선생과 일생을 함께 했다는 검은소 무덤...

    맹사성 선생 묘 전경

    맹사성 선생 묘표...

    맹사성 선생 묘비...

    맹사성 선생 묘 석물...

    맹사성 선생 묘 후경... 묘역을 중심으로 국세가 꽃잎처럼 빙둘러 감싸고 있어서 화심형(花心形)이라고 말한다.

    맹사성 선생 묘에서 학우님들 인증샷...

    맹사성 선생 묘 횡룡 용맥을 따라 내려가면 배위 철원최씨 묘가 있다.

    ▼아직 벌초를 하지않아 묘역이 어수선하다.

    맹사성 선생 배위 철원최씨 묘 후경... 수구처가 잘 막아져 있는데... 경사가 급하게 보인다. 그런데 막상 묘 앞쪽에서 보면 경사가 그렇게 심하게 보이지 않는다. 형세적으로 잘 갖춰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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