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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파주]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묘(3대대제학)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9. 2. 22. 12:33


    대제학 이관명(李觀命)(3대대제학)


    3대대제학 집안의 묘를 다 돌아다녔었는데 전주이씨 집안 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금수저일거라는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내력을 파고들면 많은 고생을 한 집안이다. 

    신임사화 때 이건명이 노론4대신으로 극형을 받았고 그 아들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관명은 이건명의 형으로 신임사화 때 극형만은 면하고 유배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면서 돌아와 좌의정까지 역임하였다.

    꽃길만 있는 인생은 없나보다. 누구나 한 두 번은 어려움을 겪기 마련인데 잘 참고 견디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 환갑이 되니 인생살이가 조금은 보이는듯 하다.



    대제학 이관명(李觀命)(3대대제학)


    1661(현종 2)∼1733(영조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이수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여(李敬輿)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민서(李敏敍)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공조정랑을 거쳐 함열현감이 되었다. 1698년 알성문과에 급제, 전조랑(銓曹郎)·사인 등을 역임하고, 이조·병조·예조 등의 참판을 거쳐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모함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이듬해 신임사화 때 아우 이건명(李健命)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극형을 받자, 이에 연좌되어 덕천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이르렀다.

    외직에 있을 때 민은(民隱)을 잘 보살폈고, 시폐(時弊)의 시정책을 촉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다. 또한, 묘당에서는 임금의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응제문(應製文)·반교문(頒敎文)·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남겼다. 흥덕동산서원(東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산집(屛山集)』 15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대제학 이관명(李觀命)(3대대제학)

    소재지

    경기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산 133(네비: 법흥리 463)

    관리자(연락처)

    전주이씨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3대대제학) 묘역 원경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묘 전경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묘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묘비와 망주석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묘비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백호쪽 망주석

    ▼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묘 후경... 비교적 국세는 잘 갖춰진 것 같으나 너무 음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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