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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가평]영의정 이재협(李在協)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3. 9. 01:53
영의정 이재협(李在協) 묘
코로나19 때문에 꼼짝 못하고 지낸지 한달여 흘렀는데 이참에 시간 날 때마다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나 혼자 다니는게 주를 이루고, 가끔 후배랑 시간이 맞으면 같이 다닌다.
이번에는 주말을 맞아 후배랑 가평, 춘천의 미답지를 찾아 나섰다. 먼저 용인이씨 충정공파 묘역...
영의정 이재협은 용인이씨 문중의 대표인물인데 자료가 매우 부실하다. 인물소개에 거의 몇줄 나오지 않는다. 왜그럴까? 내용을 살펴보던 중 문중에 역모혐의로 사사된 인물이 있어서 그리 되었다고 어떤 분의 글이 있었다. 한 집안이 흥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한 집안이 쇠퇴하는 것은 한 두 사람의 과오로 쉽게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는 듯 하다.
이번에 용인이씨의 충정공파 윗대부터 가평의 묘역까지 두루 살펴본 바 남양주 묘역이 그나마 인물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남양주의 묘역이 지금 이장공고가 나서 어찌 되는 건지 궁금하다. 이정악 묘, 이의진 묘가 이장공고 팻말이 박혀있었다.
영의정 이재협(李在協)
본관은 용인. 자는 여고(汝皐). 조부는 인평부원군 이보혁(李普赫),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경호(李景祜)이다.
1757년(영조 33) 정시(庭試) 춘당대에서 장원 급제하였고, 사간원지평·홍문관교리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763년(영조 39) 암행어사로 호서 지방을 감찰하였다. 이어 홍문관교리로서 세자시강원필선·문학 등을 겸임하였고, 사헌부헌납·홍문관수찬을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이어 승정원승지를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왕을 지근에서 보필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예조판서·이조판서·형조판서·병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또한 조부 이보혁의 공로로 인릉군(仁陵君)에 봉해졌다. 1784년(정조 8)에는 의정부참찬·병조판서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이어서 판의금부사·지경연사·좌의정·동지 겸 사은정사를 역임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디지털용인문화대전에서 인용>
이재협(李在協:1731~1789)-3대 봉군가문을 일군 영의정
이재협은 광해군때 청렴결백한 인품으로 대사간에 올라 명성을 남긴 이사경(李士慶)의 8세손으로 본관이 용인(龍仁),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중호(李重祜), 할아버지는 ‘이인좌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공조판서에 오른 이보혁(李普赫)이었으며, 정후일(鄭厚一)의 외손자였고, 승지 윤경룡(尹敬龍)의 사위였다.
이재협의 할아버지 이보혁은 평양부윤을 거쳐 성주목사가 되었는데, 그때 일어난 ‘이인좌의난’ 진압에 기여한 공적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3등에 책록 되고, 인평군(仁平君)에 봉해져 특진으로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었고, 이재협의 아버지 이중호는 이조판서에 올랐을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 작위를 물려 받아 인양군(仁揚君)에 습봉(襲封) 되었다. 거기다가 이재협까지 정조5년(1781) 병조판서에 이르러 인릉군(仁陵君)에 봉해지니, 3대가 연달아 봉군을 받은 명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조선시대 왕실 종친과 왕비의 아버지, 그리고 공신에게만 한정적으로 내려주던 작호(爵號)인 봉군(封君)은 광영이 컸던 가문의 자랑이었다. 이재협은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가문을 배경으로하여, 음보로 정5품 통덕랑(通德郞) 임명 되었다가, 영조33년(1757)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교리를 겸해 영조36년(1760 암행어사가 되어 호서지방을 검찰하고 내직으로 들어와 세자시강원필선에 문학을 겸하였다. 뒤이어 사헌부헌납·홍문관수찬·대사간·승지 등 주요 직위를 두루 역임한 이재협은, 1776년 3월, 영조가 눈을 감고 새 임금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사헌에 발탁 되어, 왕권 교체기에 흐트러진 관기를 다스리는데 마음을 써 주목을 받았다.
정조5년(1781) 병조판서에 오른 이재협은 인릉군에 피봉 되고, 우의정에 올랐다가, 정조11년(1787) 2월 좌의정이 되었는데, 같은해 7월 영의정 김치인(金致仁)과 함께 사임, 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조13년(1789) 7월 이재협은 다시 좌의정에 복직하고, 이어 곧 영의정에 올랐으나 건강 때문이었는지 그해 11월 사임하고 말았다.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이재협은 벼슬길에서 벗어난지 한달만인 그해 12월에 59세 나이로 눈을 감으니, 비교적 많지 않은 나이로 생을 마친 셈이 되었다.
이재협은 비록 높은 관직에 앉아 봉군까지 받은 정계의 거물이었으나, 명망이 인정 되지 못한 것 같다. 시호를 받은 기록이나 저서, 문헌을 남긴 흔적이 없다. 오늘날의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에 그의 묘소가 있고, 후손들이 세운 묘비가 있을 뿐 신도비는 없다.
이재협의 아들 이래현(李來鉉)은 정조13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기록이 있으나 관직에서 크게 이름을 들어내질 못한 것 같았다. 이재협의 손자 이원길(李源吉), 증손 이규동(李奎東)이 있었으나 나타나질 못했다. 이는 지친 이재간(李在簡)이 반역으로 몰려 처형 된 사건의 영향이 아니었던가 추정 된다.
이재협의 가문은 당대의 벼슬 문중으로 한때 이름을 떨쳤었다. 그의 가까운 방계 할아버지이던 좌의정 이세백(李世白)과 이세백의 아들로 영의정에 오른 이의현(李宜顯)이 부자 정승으로 돋보였고, 거기에 영의정 이재협이 올라 3정승이 난 가문이 되고, 이보혁·이경호·이중호·이재간(李在簡) 등의 4판서를 났으며, 그 다음대에 이숭호(李崇祜)·이재학(李在學)·이규현(李奎鉉)·이삼현(李參鉉)·이원명(李源命)·이돈상(李敦相) 등이 또한 판서에 오르니, 이른바 6판서 가문이 되었었다.
거기에 더불어 8대에 걸쳐 14명의 정경부인을 줄줄이 배출하였던 명문벌족이었음을 용인이씨들은 가문의 자랑으로 삼았는데, 모두 이재협의 지친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런데 번창하던 세력이 영원하기는 극히 드문 일이라 내리막 길을 맞고 말았다. 이재협의 종형제인 판서 이재간이 반역의 죄를 쓰고 처형 되는 화를 입었다. 이재간은 이재협의 숙부였던 이조판서 이경호의 아들로, 이재협과는 종형제 사이였다. 그는 한성판윤·비변사제조·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헌으로 관기숙정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는 등, 정계의 중심인물로 두각을 나타냈었다. 그러나 1789년 느닷없이 왕실을 지탄한 흉언(兇言)사건에 연루 되어 진도에 유배 되었다가 곧 처형 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재협도 신분상 큰 악영향을 받아, 왕으로부터 크게 대접을 받지 못하고 후손들도 곤란한 지경에 빠져 두각을 못 나타낸 것으로 추정 되었다.
<정연가(하동문화원장)님의 글을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영의정 이재협 묘(용인이씨 충정사)
소재지
경기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 산3-1 충정사
관리자(연락처)
용인이씨 충정공파
▼ 용인이씨 충정공파 묘역
▼ 용인이씨 충정공파 가계도
▼ 용인이씨 충정공파 충정사 입구
▼ 용인이씨 충정사 삼문인 용인문
▼ 용인이씨 충정공파 사당 충정사(忠貞祠)
▼ 용인이씨 충정공파 사당 충정사(忠貞祠)
▼ 용인이씨 충정공파 파조인 이보혁 무신기공비가 사당 앞에 세워져 있다.
▼ 용인이씨 충정공파 세계도가 그려져 있다. 영의정 이재협과 역모로 사사된 이재간(李在簡)은 사촌간이다. 이로 인해 이재협의 업적이 축소되고 신도비 조차 없게 된 듯 보인다.
▼ 충정사에서 이재협 묘소로 가는 길을 새로 내면서 산을 깎아 놓았다. 앞으로 그곳에 납골묘를 설치 하려는 듯 보인다. 아무튼 현재는 공터로 비어있는데... 비가 와서 깊게 패였다.
▼ 충정사에서 이재협 묘로 가는 길... 산을 깎아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변화된 듯 보인다. 와혈로 되어 있는데 지금 공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이재협 묘로 진입하는 계단은 만들지 않았다. 기존의 묘역 앞으로 난 계단은 폐쇄되었다.
▼ 예전 진입로는 폐쇄되고 신 진입로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
▼ 영의정 이재협 묘 측경
▼ 영의정 이재협 묘 전경
▼ 영의정 이재협 묘비
▼ 영의정 이재협 묘갈... 현손 이면영 짓고 5대손 덕규가 썼다.
▼ 영의정 이재협 묘에는 그 흔한 문인석도 없다. 좌우 망주석이 전부...
▼ 영의정 이재협 묘 측경
▼ 영의정 이재협 묘 측후경... 묘역을 정비하면서 흙을 깎고 채우고 하여 묘역이 많이 변화되었다.
▼ 영의정 이재협 묘 후경...
▼ 영의정 이재협 묘를 한바뀌 돌면서 촬영.... 앞쪽에 가파른 계단이 없어져서 조금은 나아 보이지만 이미 많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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