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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가평]용인이씨 충정공파 중시조 이보혁(李普赫) 묘(이세응, 이경호, 이면영)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3. 9. 11:21

    용인이씨 충정공파 중시조 이보혁 묘(이세응, 이경호, 이면영)

     

    가평 용인이씨 묘를 답사 하기 위해 충정사를 찾았는데 이곳이 용인이씨 충정공파 중시조인 이보혁(李普赫) 사당인 것을 알았다. 충정사 옆에는 영의정 이재협 묘가 있는데 길 건너에 이보혁 묘가 있어서 찾아 나섰다. 그런데 입구를 철망으로 문을 해놓고 자물쇠로 잠가 놓았다. 방법이 없어서 철망을 옆으로 돌아 가시덤불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맨 위쪽에 이보혁(李普赫)의 조부인 이세응 묘가 있고, 그 아래에 이보혁, 그 아들인 이경호 묘가 있으며 맨 아래에 이재협의 현손인 이면영 묘가 있다. 참고로 이보혁의 부친 이의진 묘는 남양주에 이정악 묘 옆에 있다. 

    묘역은 깔끔하게 잘 정돈 되어있다. 다녀온 후에 답사기를 쓰기위해 확인해본 결과 이 묘역들은 인근에서 이곳으로 이장해 온 것으로 나온다. 이보혁(李普赫) 묘에서 묘지명이 발견되었는데 영조가 친히 지은 묘지도 나왔다고 한다.

    한때 잘 나가던 문중이 어느 순간 어려움을 겪으며 지내는 것 같아 묘역 답사를 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때가 많다. 남양주, 가평에 있는 용인이씨 묘역들을 답사하면서 대단한 가문을 이루기 위해 선조들의 지혜를 모아 명당을 찾아 묘지도 썼고 처세도 했겠지만 한 사람의 과오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가평 답사에서 느껴진다. 이재협의 사촌 이재간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었다. 

    영의정 이재협의 묘에는 신도비는 커녕 그 흔한 문인석도 없다. 후손들이 최근에 충정사 사당을 짓고 숭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라고 보여진다. 가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한다.

     

     

    용인이씨 충정공파 중시조 이보혁(李普赫)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성원(聲遠). 시호는 충정(忠貞).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의 재종손이며,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의 조카이다. 아들인 이경호·이중호 형제를 비롯하여 후손 6명이 대과에 급제하였고, 손자 이재협은 1789년(정조 13)에 영의정을 지냈다.

    이보혁이 1728년(영조 4) 성주목사로 있을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이속과 장정들을 불러 모아 훈련을 시키고 병기를 정돈하였다. 이때 안무사 황선(黃璿)이 그에게 문무의 재능이 있음을 알고 우방장(友防將)으로 차출하여 고령·지례·거창 세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 조정에서 그의 공을 인정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이라는 훈호(勳號)를 내리고 인평부원군(仁平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로써 이보혁은 용인이씨 중 조선조에서 1품직의 공신에게 내리는 부원군(府院君)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 후 동의금부사·호조참판·병조참판·부총관 등을 거쳐 1753년에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이듬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대곡4리 2번지에 있다. 2001년에 가평군의 공원부지로 편입되어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파자 상석 아래 지석(誌石) 12매(27㎝×21.5㎝×14.5㎝)가 발견되었다. 그 중 1매는 영조가 친히 지은 어제(御製)로 확인되었다.

    <디지털용인문화대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용인이씨 충정공파 중시조 이보혁 묘(이세응, 이경호, 이면영)

    소재지

    경기 가평군 가평읍 대곡리 396

    관리자(연락처)

    용인이씨 충정공파

     

    ▼ 가평 용인이씨 중시조 이보혁(李普赫) 묘와 충정사(忠貞祠) 위성도

    ▼ 용인이씨 가계도

    ▼ 가평 용인이씨 중시조 이보혁(李普赫)의 조부 이세응(李世應) 묘

    ▼ 가평 용인이씨 중시조 이보혁(李普赫)의 조부 이세응(李世應) 묘비

    ▼ 이세응(李世應) 묘갈

    ▼ 이세응(李世應) 묘 후경

    ▼ 가평 용인이씨 중시조 이보혁(李普赫) 묘 전경... 조부 이세응(李世應) 묘 아래에 있다. 자료에 의하면 2001년에 인근에서 이곳으로 묘를 이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이보혁(李普赫) 묘

    ▼ 이보혁(李普赫) 묘비

    ▼ 이보혁(李普赫) 묘갈

    ▼ 이보혁(李普赫) 묘 망주석

    ▼ 이보혁(李普赫) 묘 후경...

     

    이경호(李景祜)

     

    본관은 용인(龍仁). 초명은 이경조(李景祚). 자는 효석(孝錫). 아버지는 좌의정 이보혁(李普赫)이다. 정제두(鄭齊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35년(영조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지평현감(砥平縣監)·담양부사를 역임하고, 1753년 충주목사로 있을 때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장례원판결사·동부승지, 좌·우승지, 병조참지·참의, 형조참의·대사간·한성부우윤·오위부총관·승문원제조·공조참판·도승지, 호조·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대사헌·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62년 아버지가 죽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인양군(仁陽君) 작위에 습봉(襲封)되었고, 1767년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추천으로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부사가 되었다가 곧 예조판서에 특배(特拜)되었다. 비변사(備邊司)·사옹원(司饔院)·혜민서(惠民署)의 제조(提調)에 이어 1773년 수어사(守禦使)·판의금부사에 특배되었다.

    1774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입사하였다. 1778년 정조의 후사(後嗣)를 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의 누이 원빈(元嬪) 홍씨(洪氏)가 간택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였으나, 가례가 이루어지자 가례청당상(嘉禮廳堂上)의 자리에 있다가 곧 병을 이유로 체직(遞職: 다른 자리로 옮김)하였다. 7월에 명릉(明陵)의 봉심(奉審)을 게을리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이보혁(李普赫)의 아들 이경호(李景祜) 묘 

    ▼ 이보혁(李普赫)의 아들 이경호(李景祜) 묘 전경

    ▼ 이경호(李景祜) 묘비

    ▼ 이경호(李景祜) 묘갈

    ▼ 이경호(李景祜) 묘 망주석

    ▼ 이경호(李景祜) 묘 후경

     

    이면영(李冕榮)

     

    대한제국기 궁내부특진관, 장례원경 등을 역임한 관료.

    본관은 용인(龍仁). 초명은 이면광(李冕光). 자는 주숙(周叔). 군수 이원길(李源吉)의 아들이다.(오류:군수 이원길(李源吉)의 손자, 이규동의 아들이다. 참고:이재협 묘갈)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교리·검교 등을 거쳐 대사성·이조참의·승지를 지냈다.

    1882년(고종 19)과 그 이듬해에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어 임오군란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 대원군의 심복으로 고관이었던 이회정(李會正)·임응준(任應準)·정현덕(鄭顯德) 등을 유배가 아니라 사형에 처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여 사사(賜死)되도록 하였다.

    인창군(仁昌君)을 습봉(襲封)하였고, 충훈부유사당상(忠勳府有司堂上)으로서 감생청(減省廳)의 충훈부권한축소계획에 반대하였다. 1884년부터 1902년까지는 대사헌·대사간·궁내부특진관·장례원경(掌禮院卿)을 잠시 지냈을 뿐이고 요직에 발탁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영의정 이재협의 현손 이면영(李冕榮) 묘

    ▼ 영의정 이재협의 현손 이면영(李冕榮) 묘

    ▼ 이면영(李冕榮) 묘에는 묘비가 없이 상석에 표기 하였다.

    ▼ 영의정 이재협의 현손 이면영(李冕榮)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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