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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고양]김신민(金新民), 김당(金璫)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5. 27. 15:25

    김신민(金新民), 김당(金璫) 묘

     

    언제 다녀온 곳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저장된 기록을 보니 2012년이니 오래된 기록이다.

    인근에 김전선생 묘가 있어서 그곳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다닌 기억이 나는데 아마 그때 생각지도

    않게 찾은 묘역이라 생각된다.

    묘지답사를 하다보면 내가 찾으려는 묘는 못찾고 생각지도 않은 묘를 찾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지금 이곳은 하루가 다르게 개발이 되고 있어서 오래 전에 찾은 묘역이라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도 되는데 위성사진을 보니 그대로 있는듯 하여 그냥 올린다. 이해 바란다.

     

    김신민(金新民)

     

    1458년(세조 4) 1523년(중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김신민(金新民, 1398년 ~ 1465년 9월[1])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지(明之), 본관은 경주이다. 김중성(金仲誠)의 차남이다.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응교,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종학박사에 제수되었다. 종학박사로 재임 중 간관의 신분도 아니었지만, 불당 건립을 막기 위해 세종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사간원 우사간대부가 되었으며, 세종 승하 후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 즉위 후에도 불사를 파할 것을 간하였으나, 문종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종 즉위 후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세조 즉위 후에는 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이후 성균관사성을 거쳐 경창부윤이 되었으며, 이후 벼슬이 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1465년(세조 11) 졸했다. 향년 68세.

    <위키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김신민(金新民), 김당(金璫) 묘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194-9

    관리자(연락처)

    경주김씨

     

    좌찬성 김당(金璫)

     

    1458년(세조 4) 1523년(중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옥이(玉耳). 김중성(金仲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신민(金新民)이고, 아버지는 목사 김태경(金泰卿)이며, 어머니는 변균(卞鈞)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했고, 1495년(연산군 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성균관학록과 예문관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4년 예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이듬해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도시첨정·성균관사예·승문원교감 겸 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역임했는데, 봉교 이후 계속해 사직(史職)을 겸임하였다.
    1506년 성균관사성 겸 승문원참교를 거쳐, 중종반정 후 사간이 되었으나 김세필(金世弼)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봉상시부정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장례원정으로 오른 후 이듬해 홍문관전한, 그 이듬해 직제학을 거쳐 우부승지·도승지에 올랐다. 1512년(중종 7)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경직에 다시 들어왔다.
    이어 한성부우윤, 경기도·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와 대사헌 및 공조·형조·병조·호조·예조의 참의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1519년 기묘사화 때에는 호조참판으로서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처벌에 참여해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명나라에 진향사(進香使)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526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1531년 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으며, 우찬성·판의금부사·오위도총관을 거쳐 좌찬성으로 재임 중 죽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솔직했으나, 일관된 마음가짐이 없었다는 사신(史臣)의 평가를 받았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경주김씨 김신민 묘비..

    ▼  경주김씨 김신민 묘 전경..

    ▼  경주김씨 김신민 묘..

    ▼  경주김씨 김신민 묘 석물

     

    ▼  경주김씨 김신민 묘 청룡방...

    ▼  경주김씨 김신민 묘 백호방...

    ▼  경주김씨 김신민 묘 후경

     

    좌찬성 김당(金璫)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옥이(玉耳). 김중성(金仲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신민(金新民)이고, 아버지는 목사 김태경(金泰卿)이며, 어머니는 변균(卞鈞)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했고, 1495년(연산군 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의정부사록·성균관학록과 예문관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4년 예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이듬해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이어 사도시첨정·성균관사예·승문원교감 겸 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역임했는데, 봉교 이후 계속해 사직(史職)을 겸임하였다.
    1506년 성균관사성 겸 승문원참교를 거쳐, 중종반정 후 사간이 되었으나 김세필(金世弼)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봉상시부정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장례원정으로 오른 후 이듬해 홍문관전한, 그 이듬해 직제학을 거쳐 우부승지·도승지에 올랐다. 1512년(중종 7)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경직에 다시 들어왔다.
    이어 한성부우윤, 경기도·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와 대사헌 및 공조·형조·병조·호조·예조의 참의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1519년 기묘사화 때에는 호조참판으로서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처벌에 참여해 변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명나라에 진향사(進香使)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526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1531년 한성부판윤·지중추부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으며, 우찬성·판의금부사·오위도총관을 거쳐 좌찬성으로 재임 중 죽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솔직했으나, 일관된 마음가짐이 없었다는 사신(史臣)의 평가를 받았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좌찬성 김당(金璫) 신도비

    ▼  좌찬성 김당(金璫) 묘갈

    ▼  좌찬성 김당(金璫) 묘비

     

    ▼  좌찬성 김당(金璫) 배위 묘

    ▼  좌찬성 김당(金璫) 묘 석물

     

    ▼  좌찬성 김당(金璫) 묘 후경

     

    ▼  좌찬성 김당(金璫) 묘역은 밀집되어 뒷 묘의 장명등이 후경에서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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