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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광주)영의정 여성제 묘 및 신도비, 생가지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20. 12. 6. 14:42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영의정 여성제 묘를 처음 찾은 것은 거의 15년이 된 듯 하다. 처음에 분원리를 방문하고 그 부근에 있던 김석주 묘를 본 뒤 여러 차례 그 일대를 답사 했었는데 도로변에 여성제 묘 및 신도비 간판이 있어서 무작정 찾아 나선 것이 첫 번째 방문이었는데 그 때부터 이 묘하고 인연이 박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정말 어렵게 찾은 묘라서 구구절절이 사연을 올려본다.

    혼자서 찾아갔을 때 어렵게 밭 가운데서 신도비를 봤는데 묘는 그 인근에 계신 분들도 잘 모르는 듯 보여서 첫날은 그냥 왔다.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지도를 분석하고 진입로를 확인하고 찾았는데 그때도 혼자 찾아갔다. 무더운 여름날인데 숲이 우거져서 도저히 진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입구에서 되 돌아 오고 말았다. 돌아오면서 여성제 생가를 찾았는데 다 쓰러져 가는 한옥 건물이 안타까웠다.

    세 번째로 찾았을 때는 큰 맘 먹고 오늘은 꼭 찾아보리라 다짐했는데 입구에서 허망하게 되 돌아 왔다. 입구 민가 주인이 하시는 말씀이 이곳에는 살모사가 엄청 많아서 자기네들도 못 들어간다고 하신다. 놀라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뱀이 없는 한겨울에 후배랑 함께 찾았다. 역시 혼자 찾을 때는 용기가 없었는데 후배랑 함께하니 가파른 경사로도 쉽게 넘어서 그토록 찾고 싶었던 여성제 묘를 찾았다. 특별히 찾아야 할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광주, 남양주, 양평 쪽 미답지로 항상 남아있어서 마음 한구석이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번에 해소 되서 마음이 홀가분하다. 15년 만이다.

    이곳은 조선조 정승들의 묘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산등성이에 용호사격이 잘 갖춰진 곳에 묘역을 잡은 곳인데 숲과 나무가 우거져 주위 사격은 잘 보이지 않고 위성지도를 통해 보면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함양여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이 여운형의 월북으로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묘역을 관리하는 후손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고, 마을 주민의 말을 빌자면 후손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는데 일대의 땅들도 거의 팔았고 묘지가 있는 곳도 한국자산공사 소유로 되었다고 한다. 

    묘역, 신도비, 생가를 둘러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더 늘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니 관에서 나름 정비, 보수를 해줬으면 하고 바래본다. 생가는 지금 철거한 상태로 광주시에서 보관한다고 들었고, 신도비는 남의 땅에 들어있어서 관리가 시급한 상태다. 묘역도 진입로를 만들어서 참배객들에게 편리를 제공해야 될 것이다.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천(希天), 호는 운포(雲浦). 여순원(呂順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여우길(呂祐吉)이고, 아버지는 부사 여이량(呂爾亮)이다. 어머니는 한효순(韓孝純)의 딸이다. 참판 여이징(呂爾徵)의 양자가 되었다.(양부 여이징, 양모 청주한씨-인조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아버지 한준겸의 딸) 양자가 되면서 한준겸의 외손자로서 국척 관계(國戚關係)에 있었으며, 배위 금천 강씨는 강문성의 딸로 강석기의 손녀였다.(후에 민회빈 강씨의 옥사가 있었을 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강씨와 이혼하고 윤씨와 재혼했으나 옥사의 무고함이 풀리자 다시 강씨와 함께 살았으며 이후 강씨는 고첩을 돌려받아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아버지가 한백겸(韓百謙)의 문인이었으므로 그 영향을 받았다. 1650년(효종 1) 생원시에 장원하고 1654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같은 해 가을에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되었다. 이후 북평사(北評使)·집의(執義)·동부승지 등을 거쳐 호남을 자세히 살펴 규찰해 유업(儒業)과 무예에 치적이 많았다.
    외직에서 돌아와 호조참의·대사간·좌부승지 등을 거쳐, 북도(北道)를 자세히 살펴 규찰했으며, 1678년(숙종 4) 강릉부사에서 예조판서로 특진, 발탁되었다. 1680년 조정에서 보사공신(保社功臣)을 추가로 선정할 때, 공정하지 못한 공신 추록은 여론의 의혹을 더욱 살 것이며, 이사명(李師命)·신범화(申範華) 등의 봉군(封君)을 환수하고 김석익(金錫翼)의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으로 올려줌)도 개정해야 한다고 반대 상소를 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좌천되었다.
    이듬해 앞서 현종의 국상(國喪) 때 도감(都監)에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의금부사·좌찬성을 역임한 뒤 1684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정가에서 분경(奔競)과 뇌물이 심하자 이를 근절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1688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 해에 왕이 동평군(東平君)을 지나치게 총애하자 박세채(朴世采)와 남구만(南九萬)이 간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유배되었다. 여성제는 이 사건을 구해(救解: 도와서 화해시킴)하려다가 경원으로 정배되었다. 그 뒤 곧 용서되어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며, 1689년 좌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여성제는 소론으로, 당시 집권층인 남인과의 의견 충돌로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이 때 남인들이 성혼(成渾)·이이(李珥)를 문묘에서 출향(黜享: 배향한 위패를 거둬들임)하려 하자 부당함을 진소(陳疏)하였다.
    또한 앞서 성혼·이이의 배향시에 춘관(春官: 예조)의 관리로서 관계되었다고 해서 죄를 얻어 양강(楊江)으로 귀향가서 풀려났다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 소식을 듣고 상경해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 때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은 극간하다가 죽고, 여성제와 이상진(李尙眞)만이 끝까지 상소하였다. 이 일이 허사가 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울분으로 1691년 8월에 죽었다. 저서로는 『운포집』이 있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기도기념물 제8호

    문화재명칭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및 신도비

    소재지

    묘:경기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 산 101-10(주차:남종면 수청리 693-10 민가 양해구하고 주차)

    신도비:남종면 수청리 693-3, 생가:남종면 수청리 254-2

    관리자(연락처)

    함양여씨(관리가 안되고 있음)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는 인터넷 어디에도 찾아가는 방법이 없어서 이번 포스팅은 찾아가는 길 안내 위주로 올리니 뒤에 가시는 분들은 편하게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여성제 묘역의 용맥도...용호가 잘 갖춰져 있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찾아가는 방법... 이곳에서는 주차하기가 제일 어려운데 민가 마당에 부탁하고 잠깐 주차를 했다. 이것만 해결되도 한결 쉬어진다.ㅎ

    코스#1번이 제일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인데 인근 주민 말씀이 개인 사유지인데 등산객들이 이 길로 다니면서 개인이 심어 놓은 더덕 등을 마구 캐가서 출입을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겨울철에는 양해를 구하고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코스#2번은 마을 주민이 알려준 코스인데 제가 그 길로 가보지는 못했다. 참고하시길...

    코스#3번은 처음에 묘역을 오를 때 길을 몰라 무작정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올랐는데 조금 가파른 곳이다. 대신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다.

    봄,여름 농사철에는 2번코스로 오르길 추천드리고, 겨울에는 1번을 추천드린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역 안내판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전경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앞 상석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보통은 묘표를 대신해 누구 묘라고 새기는데 이곳은 좀 특이하다.

     

    ▼ 영의정 여공 상석(領議政 呂公 床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향로석이 기울어져 있고... 전반적으로 석물들이 조금씩 기울어져 있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비... 이곳에는 여성제의 첫번째 배위 금천강씨와 합장이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장명등... 서있는 모양이 위태롭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석물... 대체로 기울어져 있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측경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후경... 앞쪽에 나무가 우거져있어 조안산은 안보인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로 들어가는 입수용...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는 용이 멈추지 못하고 앞쪽으로 길게 끌고 나간다. 이 능선을 타고 내려왔는데 이 능선으로 진입하면 좀 더 쉽게 묘역을 오를 수 있다.

     

    ▼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출발점 민가를 만날 수 있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안산... 나지막하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묘 오르는 길 1번길...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신도비... 밭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가시덤불과 넝쿨식물들이 신도비를 둘러싸고 있어서 보기 흉하다.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신도비

     

    ▼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생가터... 이곳에 있던 생가건물 목재들은 광주문화원에서 보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생가터 자리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인근에 쓰러져 있는 한옥 건물은 여성제 생가의 다른 건물이라고 한다.

     

    ▼ 여성제(呂聖齊) 생가 옆에는 수청호 선착장이 있는데 배만 있고 관리하는 사람은 안보인다.

     

    ▼ 수청호 선착장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

     

    ▼ 이곳에는 포토존도 만들어져 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사용해 줘야 의미가 있으니...

     

    ▼ 나부터 인증샷...ㅎ

     

    <영의정 여성제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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