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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원천석 선생 묘... 신도비는 왜 묘역 안쪽에 숨겨져 있을까?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3. 27. 00:28
원천석(元天錫, 1330년~?)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아전층의 후손으로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윤적(允迪)의 아들이다.
문장과 학문으로 경향간(京鄕間)에 이름을 날렸으나, 출세를 단념한 채 한 번도 관계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은사로 지냈다.
군적에 등록될 처지가 되자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진사에 합격했다. 그는 이방원(뒤의 태종)의 스승을 지낸 적이 있어 태종이 즉위 후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치악산에 있는 그의 집으로 친히 찾아와도 자리를 피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야 백의(白衣)를 입고 서울로 와 태종을 만났다고 한다. 비록 향촌에 있었으나 여말선초의 격변하는 시국을 개탄하며 현실을 증언하려 했다.
만년에 야사를 저술해 궤 속에 넣은 뒤 남에게 보이지 않고 가묘에 보관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증손대에 와서 사당에 시사(時祀)를 지낸 뒤 궤를 열어 그 글을 읽어보았는데, 멸족(滅族)의 화를 가져올 것이라 하여 불태웠다고 한다.
문집으로는 〈운곡시사 耘谷詩史〉가 전한다. 이 문집은 왕조 교체기의 역사적 사실과 그에 관한 소감 등을 1,000수가 넘는 시로 읊은 것으로 제목도 '시사'라 했다. 야사는 없어졌으나 이 시가 하나의 증언으로 남아 있어 후세의 사가들은 모두 원천석의 증언을 따랐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로 시작하는 고려왕조를 회고하는 시조 1수가 전한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봉요혈(蜂腰穴)로 알려진 운곡 원천석 음택 <원주시 행구동 산37>
행구동 산 37번지에 소재한 운곡의 묘소는 친구였던 세 살 터울 위인 무학대사가 소점 해주었다고 전한다. 당시 무학대사가 두 개의 자리를 놓고 집안에 벼슬과 부귀를 안겨주는 자리와, 만대자손(萬代子孫)에게 평화를 주는 자리 중에서 택하라고 하자 운곡이 후자를 택해 지금의 자리로 정해졌는데, 지금도 원씨 문중은 크게 흔들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곳 묘소는 1971년에 봉분의 일부가 도굴 당했으나 내광이 석관(石棺)이 되어, 관내(棺內)까지는 파지 못했다고 한다.
선생의 본관은 원주이며, 자(字)는 자정(子正)이고 호는 운곡(耘谷)이다. 1330년(고려 충숙왕 13)에 종부시령의 작은 벼슬아치였던 부친인 윤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글 잘 짓기로 유명한 선생은 국자진사(國子進士)를 지냈으며, 조선 3대왕 태종의 스승이기도 하다. 고려가 망하자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에 숨어살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조선 건국 초기에 선비들이 변절하던 시절에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켰다.
운곡은 생전에 시 1,144수를 남겼는데「회고가」중, 일부이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五百年)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태종은 왕이 되자 세 번이나 치악산으로 찾아가 스승을 뵙고자하였으나 몸을 숨기고 만나주지 않았다. 치악산 태종대는 그 때 태종이 원천석을 기다리며 잠시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태종이 그를 찾아간 것은 스승에 대한 예우를 생각한 면도 있었지만 뛰어난 학자를 새 왕조에 받아들임으로써 명분을 얻어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한 수단도 있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태종은 원천석의 아들 원형을 현감으로 등용하여 다소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무학대사가 점지한 이곳 음택을 두고, 풍수인들 사이에 혈적(穴的) 여부에 대해 설왕설래(說往說來), 논쟁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연구소에서는 이번 기회에 선생의 묘소에서 봉요혈의 진위(眞僞)여부를 확실히 밝히고자 한다.
을입수(乙入首)에 정침(正針)은 진좌술향(辰坐戌向), 봉침(縫針)은 을좌신향(乙坐辛向)으로 격침(格針)되고, 묘소아래 분수척(分水脊)에서 양파(兩破)되는 수구(水口)는 좌수(左水)는 경파(庚破), 우수(右水)는 해파(亥破)로 갈무리 된다.<석초 채영석 선생 답사기 인용>
운곡선생의 묘 답사는 이번이 두번째 답사입니다. 풍수인들 사이에 많은 의견들이 있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는 묘인데 이번 답사에서는 원주에 계시는 우리 학회의 채희정 고문께서 안내겸 현장 토론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운곡 원천석 선생 사당 창의사 외삼문
원천석 선생 묘역 안내판... 사진촬영이 잘못되었다..
원천석 선생 묘역 입구... 3월말인데 며칠전 내린 눈으로 운치가 아주 좋다...
원천석 선생 묘역.. 백호에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이렇게 떨어지면서 다시 올라채는 형태는 벌의 몸통과
같다하여 봉요협이라 한다. 봉요혈이라는 말은 지가서에는 없는 말이라 한다.
원천석 선생 묘역 전경...
원천석 선생 묘역.. 윗쪽에서 나무에 쌓여있던 눈들이 녹아서 떨어지는 모습들이 멋지다...
원천석 선생 묘역 청룡쪽.. 바위들이 뾰족하게 나와있는데...
원천석 선생 묘비...
묘역에 있는 바위는 깊게 박혀있으면 보통 요석이라하여 좋게 보는데 오늘 토론에서는 요석이 아니라 좋지못한 암석이라 한다.
원천석 선생 신도비..신도비는 묘역입구나 마을 어귀에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세운다.
원천석 선생 신도비는 묘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 왜 그럴까..?
원천석 선생 생존시에 무학대사가 말하기를 윗 지점은 부귀영화를 누릴 곳이요 아래지점은 백대 자손이 번영할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운곡 선생은 부귀영화를 택하지 않고 후손을 위하여 봉요혈(蜂腰穴) 형곡으로 정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원래는 묘표(墓表)가 없었으니 유교 때문이었으나 4세대가 지나면서 비로소 비석을 세웠다. 일설에는 처음에 직함을 넣어서 건립하였더니 항상 비석에서 땀이 흐르기에 그 후에 직함을 빼게 되었다.
원천석 선생 신도비 전경...
비석은 숭정후(崇禎後) 27년 경술년(서기 1650년) 3월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통훈대부전행사헌부(通訓大夫前行司憲府) 양천 허목(陽川 許穆)이 천문(擅文)하고 전서(篆書)로 고려국 지진사운곡선생묘비라고 횡(橫)으로 두서(頭書)하였다.
원천석 선생 신도비 전면...
원천석 선생 신도비 후면...
원천석 선생 신도비 앞에서 인증샷...
내 생각은 이렇다. 원래 신도비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세운다. 신도비를 세울 당시에 묘역에 이르는 주 출입로는 신도비 아랫쪽 묘역의 왼쪽 청룡자락과 묘역의 사잇길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근자에 백호쪽으로 길을 내면서 원래 길이었던 청룡쪽 길이 없어져 버린 경우라고 생각한다. 확인을 해보니 지금도 신도비 아랫쪽으로 작은 길이 나 있었다.
원천석 선생 부인 묘로 전해지는 묘가 앞쪽에 있다. 겨울에는 그나마 눈이 덮혀있어 보기 괜찮으나 다른때는 잔디가 죽어있어 볼쌍 사납다.
앞쪽 묘에서 바라본 모습.. 뒷쪽에 원천석 선생 묘가 보인다.
원천석 선생 부인 묘로 전해지는 묘 후경... 앞쪽은 낭떨어지인데 똑바로 뻗지못하고 좌로 굽었다. 풍수에서는 주맥이 정룡이 되지못하고 휘어지면 혈을 맺지 못한다고 한다.
원천석 선생 묘 동영상
<풍수판단-현장토론>
■ ○- 청룡이 감아주지 못하고 쭉 뻗어버림
- 백호(내백호)가 호종을 못하고 끊김
- 주맥의 끝이 왼쪽으로 휨(주인이 못되고 청룡을 받드는 형상)
□ ▷ - 애금전화(埃金剪火)형국
:火는 가위로 자르듯 잘라 버리고 金에 올려 붙여라
♤기룡혈(騎龍穴)
일반적으로 혈은 용맥의 마지막 부분인 용진처에 맺는데 괴혈인 기룡혈은 행룡하던 중간에 잠시 머뭇거리다 언뜻 주저앉듯이 혈을 만들어 용의 등마루인 용맥 위에 말을 타고 있는듯하다 하여 기룡혈이라 한다.
이 혈은 상층의 맥은 멈추어 혈을 맺고 하층의 맥은 계속 행룡한다.
또한 혈장 바로 앞에는 명당이 없으며 혈좌 위치에서 보면 양쪽으로 두개의 명당을 활용하게 되는 것으로 산세의 기운이 모이고 음양의 배합을 이루게 된다.
기룡혈은 좌와 우의 양쪽 출수지법(出水之法)을 각각 활용하게 되므로 어느 한쪽의 결합 여부를 보고 길흉을 논하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과룡(過龍)에 장사 지내지 말라 - 書에 이르고 있다. 만약 이곳에 장사 지내면 三代안에 절손의 禍를 면키 어렵다 했다.
□ ▷ - 청룡이 무너져서 장남이 절손
- 기룡혈은 틀면서 내려오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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