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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의왕]영의정 한익모 선생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6. 15. 10:00

     수원에 일이있어 갔다가 시간이 남아 인근 의왕에 있는 영조 때 영의정 한익모 선생묘를 답사했습니다.

     

    한익모(韓翼謩)

     

    1703년(숙종 29)∼1781년(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보(敬甫), 호는 정견(靜見). 진사 사범(師範)의 아들이며, 형은 대사헌 현모(顯慕)이다.
    1733년(영조 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지평·수찬·이조정랑·승지·광주부윤(廣州府尹)·대사간 등의 관직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1762년 판의금부사로 나경언(羅景彦)의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고변이 있자 이를 사주한 배후를 철저히 가릴 것을 적극 주청하였고, 이어 대제학으로서 사도세자가 죽은 경위를 밝히는 교서의 작성을 끝내 거절하여 삭탈관직되었다.
    그러나 그뒤 그 기개가 높이 평가되어 1766년 좌의정에 탁배(擢拜)되어, 백두산의 망사(望祀)를 설행하게 되면서 갑산의 망덕산(望德山)에 제각을 세우게 하였고 1772년 영의정이 되었다.
    얼마 뒤 정조가 즉위하여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장한 홍인한(洪麟漢) 등을 국문할 때, 불참한 죄로 삭직되고 이어 풍천에 유배되었다가 연안으로 이배되었다.
    이듬해 귀양이 풀렸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인용>

     

             

     

    한익모(韓翼모:1703~1786)-끝이 불우한 양관대제학 역임 정승

     

    세조의 사돈에 성종의 외할아버지인 좌의정 한확(韓確)의 후손이던 한익모는, 진사 한사범(韓師范)의 아들이다. 그의 선대에 선조때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있어 이가 곧 6대조였고, 증조부 한성우(韓聖佑)는 이조참판, 한익모의 형에 한현모(韓顯모)가 있어 그는 대사헌이었다.
    한익모는 영조7년(1731) 28세때 황감제(黃柑製)라는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예문관에 들어가 관직을 시작하였다. 황감제는 성균관에서 학업에 열중하는 유생들의 사기를 높이고 그들의 면학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제한적으로 그들만을 대상으로 치른 과거였는데, 해마다 제주도특산물 감귤이 진상품으로 올라오면, 성균관명륜당에 유생들을 모아 놓고 감귤을 나누어 준 뒤, 시제를 내려 시험을 보게했던 과거였다.
    이어 사헌부·사간원·세자시강원·홍문관 등 이른바 권력의 핵심부를 짧은 기간에 두루 거치며 실무를 익힌 한익모는, 부모를 가까이서 봉양할 수있는 용강현령으로 나가 목민에 힘쓰다가, 영조9년(1733) 다시 식년문과에 상위 등급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수찬·이조정랑·승지·이조와 예조의 참의 등 현직(顯職)을 두루 역임하고,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역질과 흉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살폈다.  이 무렵 3남지방은 전염병과 흉년으로 민생이 극도로 어려웠다. 3월에 경상도 웅천, 창원, 김해지방에 지진이 일어 민심이 흉흉한데다 전염병이 창궐, 봄부터 여름내내 병마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통계에 잡힌 사망자가 1만여에 이르렀고, 5월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경상도에서만도 굶는 사람이 17만9천여명, 거지로 떠도는 백성이 1만1천7백여명, 먹지 못해 죽은 백성이 1천3백여명이나 되었다. 호남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 백성들은 질병과 기근에 시달리는 가운데 남원 여러곳에는 흉흉한 민심을 부채질하는 괘서(掛書)사건이 벌어져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영조26년(1750) 12월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인구는 661만여명, 서울 인구는 18만여명이었는데, 그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자그만치 40여만명이라, 나라 형편이 이처럼 안타까운 지경이었다.  
    어려운 민생을 겪은 한익모는 영조32년(1756) 한성판윤에 이어 광주유수를 역임하고, 이듬해 어머니 기계 유씨(兪氏)가 세상을 뜨자 치상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기(喪期)를 마치고 이조판서에 기용되었다. 이후 예조·형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헌·참찬·세자빈객을 역임하고 홍문·예문 양관대제학이 되어 명망이 높아졌다. 그러나 그는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교서를 쓰라는 영조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기까지 했다.
    한데 이일로 그는 기개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 영조42년(1766) 좌의정이 되고, 영조48년(1772) 10월, 70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일흔이 된 나이라 기로소에 들고 곧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 되지 않아 여러차례 영의정자리를 오르내리며 기세(棄世) 직전의 영조를 정성껏 보필하였다.
    영조52년(1776) 3월, 춘추 83에 이른 영조가 재위 53년만에 세상을 떴다. 실로 조선조 500여년의 10%가 그의 치세였던 셈이다. 온갖 시달림 끝에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정치판을 바닥채 뒤집어 버렸다.
    우선 그의 목숨을 노리기까지 했고, 등극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던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참판 정후겸(鄭厚謙)을 잡아다가, 저승 문턱을 넘기 직전까지 닥달한 끝에 귀양 보낸 뒤, 뒤따라 사약을 보내 죽였다. 
    뿐만아니라 아버지 사도세자가 궤짝속에 들어가던 날 한강뱃놀이를 즐겼던 외조부 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도 관작을 뺏고 도성 밖으로 출송(黜送)해버렸다.
    이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새시대를 여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친정 아버지를 처단한다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양해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한익모도 걸려 들고 말았다. 세손시절 정조를 보호하는데 힘썼던 서명선(徐命善)이 한익모를 비난했다.
    노론 벽파 홍인한 등에게 밀려 참판직에서 부사과(副司果)라는 말단 무관직에 좌천당해 이를 갈던 서명선이, 홍인한 편이던 전조 말기의 영의정 한익모를 걸어, 홍인한 추국자리에 한익모가 빠졌었다는 탄핵을 올려, 정조 반대도당으로 매몰차게 몰아 부쳤던 것이다.
    이에 한익모도 삭탈관직과 함께 풍천, 연안 등지로 옮겨가며 귀양을 살았다.
    이듬해 풀려난 한익모는 시골에 은거하다가 84세 일기로 과천에서 숨을 거두니, 젊었을때의 명망에 비해 말년이 초라했다. 뒤에 문숙공(文肅公)으로 시호가 내려진 그의 묘소는 경기도 의왕 월암동에 있다.
    그의 사위 판중추부사 심이지(沈이之)가 짓고, 아들 군수 태유(泰裕)가 글씨를 쓴 묘갈이 있다.
    또 한아들 정유(鼎裕)는 승지였고, 손자 용중(用中)은 영의정 김익(金익)의 사위가 되었다. 한익모의 사위 심이지는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때 청나라 사신으로 나갔다가 병사한 명신이었다

    <인터넷 블로그, 카페 등에 올려진 글 인용, 대표출처 하동알리미 : 한익모(韓翼모:1703~1786)-끝이 불우한 양관대제학 역임정승 |작성자 하동 짱>

     

     

     

     

     

     

     

     

     

     

     

     

     

     

     

     

     

     

     

     

     

     

     

     

     

     

     

     

     

     

     

     

     

     

     

     

     

     

     

     

     

     

     

     

     

     

     

     

     

     

     

     

     

     

     

     

     

     

     

     

     

     

     

     

     

     

     

     

     

     

     

     

     

     

     

     

     

     

     

     

     

     

     

     

     

     

     

     

     

     

     

     

     

     

     

     

     

     

     

     

     

     

     

     

     

     

     

     

     

     

     

     

     

     

     


     

    한익모 선생묘 주변의 변천상황

    3년전


     

    1년전

      

    2011년

     

     

     

     

     

     

     

     

     

     

     

     

     

     

     

     

     

     

     

     

     

     

     

     

     

     

     

     

     

     

     

     

     

     

     

     

     

     

     

     

     

     

     

     

     

     

     

     

     

     

     

     

     

     

     

     

     

     

     

     

     

     

     

     

     

     

     

     

     

     

     

     

     

     

     

     

     

     

     

     

     

     

     

     

     

     

     

     

     

     

     

     

     

     

     

     

     

     

     

     

     

     

     

     

     

     

     

     

     

     

     

     

     

     

     

     

     

     

     

     

     

     

     

     

     

     

     

     

     

     

     

    예전에 다녀오신 분들의 사진을 보면 묘역 앞쪽이 비교적 괜찮았는데 금일 현재는 묘역 앞쪽에는

    재외동포청소년한국어교육관 신축 공사가 한창이어서 공사가 끝나면 아마도 안산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

    한익모 선생은 70세 말년에 영의정을 하셨지만 그 이후 돌아가실 때 까지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묘역도 점점 훼손되고 백호가 잘리더니 조안산이 부셔지고 지금은 고립된 느낌이 든다.

    들어오는 용맥은 길을 따라 남아 있는듯이 보여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든다. 이 용맥도 야산이어서

    언제 잘릴지 알 수 없다.

     

     

     

     

     

     

     

     

     

     

     

      

    ▼ 한익모 선생묘역 입구

     

    ▼ 한익모 선생묘역 오르면서...

     

    ▼ 한익모 선생묘역

     

     

    ▼ 한익모 선생묘-묘는 배위 기계유씨와 합장되었고, 봉분 앞 중앙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그리고 좌우에는 망주석이 갖추어져 있다.

     

    ▼ 한익모 선생묘 안내판

     

    ▼ 한익모 선생묘 청룡쪽 망주석

     

    ▼ 한익모 선생묘 백호쪽 망주석

     

    ▼ 한익모 선생묘 묘비(4면-전면에서 시계방향으로)

    정조 21년(1797)에 세운 묘비는 대리석에 4면을 각자했고,

    비문은 사위 심이지(沈頤之)가 짓고, 아들 순창군수 태유(泰裕)가 썼다

     

     

     

     

     


     

     

     

     

     

     

     

     

     

     

     

     

     

     

     

     

     

     

     

     

     

     

     

     

     

     

     

     

     

     

     

     

     

     

     

     

     

     

     

     

     

     

     

     

     

     

     

     

     

     

     

     

     

     

     

     

     

     

     

     

     

     

     

     

     

     

     

     

     

     

     

     

     

     

     

     

     

     

     

     

     

     

     

     

     

     

     

     

     

     

     

     

     

     

     

     

     

     

     

     

     

     

     

     

     

     

     

     

     

     

     

     

     

     

     

     

     

     

     

     

     

     

     

     

     

     

     

     

     

     

     

     

     

     

     

     

     

     

     

     

     

     

     

     

     

     

     

     

     

     

     

     

     

     

     

     

     

     

     

     

     

     

     

     

     

     

     

     

     

     

     

     

     

     

     

     

     

     

     

     

     

     

     

     

     

     

     

     

     

     

     

     

     

     

     

     

     

     

     

     

     

     

     

     

     


    ▼ 한익모 선생묘- 백호쪽에서 바라본 전경

     

    ▼ 한익모 선생묘-멀리 외청룡이 보인다

     

    ▼ 한익모 선생묘 후경... 재외동포청소년한국어교육관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있다.

     

     

    ▼ 한익모 선생묘 백호.. 길을 내면서 잘렸는데 그나마 공사가 한창이다..

     

     

    ▼ 한익모 선생묘 - 청룡쪽에서 바라본 전경.. 길이나있는데 묘역 백호너머로 대로가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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