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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흥]하연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24. 10:00
하연선생 묘
시흥시 일원의 묘지답사를 좀 여유있게 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김준용장군 묘를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김치인 묘를
찾느라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마지막 하연선생 묘는 포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선생의
묘가 서향이라 늦게까지 해가 비치는 바람에 사진촬영을 할 수 있어서 답사를 무사히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다.
이곳은 소래산하 무공단좌형의 대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묘역에서 보면 멀리 넓게 명당이 펼쳐지고 외청룡과 외백호가
외명당을 이루며 크게 감싸고 있다. 후세에 끊임없이 인재가 나온다는 곳이다.
하연(河演)
1376년(우왕 2)∼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부윤 자종(自宗)의 아들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하였다 한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을 받아 예조판서·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曹溪宗)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 받았다.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문종 1)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년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진양연고(晋陽聯藁)》가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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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향토유적 3호 하연선생 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12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12(소산서원길로 접어들려면 신천동 422) 진주하씨 문효공파
하연(河演)선생 묘
하연(河演, 1376~1453)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ㆍ신희옹(新稀翁),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태조 5년(1396)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 대사헌, 좌찬성,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고, 편서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진양연고(晉陽聯藁)』가 있으며, 저서로는 『경재집(敬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묘는 풍수로 보아 무공단좌형(武公端坐形)으로 후세에 인재 부귀가 끊이질 않을 명당지로 알려지고 있다. 묘의 좌형은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남향이다. 묘는 소래산 중턱 남쪽기슭에 있는데, 묘역을 중심으로 앞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우측에 묘비, 좌측에 장명등, 좌우에 문신석인과 석양(石羊) 한 쌍이 배치되어 있다. 묘는 정경부인 성산 이씨와의 합장이다. 정경부인 성산 이씨는 묘비 및 『진양하씨대동보』에도 성산 이씨로 기록되어 있다. 묘비의 비신은 높이 1.33m, 폭 51cm, 두께 20cm이다.
신도비는 묘소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비문은 남지(南智)가 짓고 글씨는 김교직(金敎直)이 썼으며 아울러 전자(篆字)하였다. 이 신도비는 1940년 10월에 건립하였는데 진주 하씨 문효공파 중앙종친회측에 따르면, 이 비문은 선생의 사망 후 선생의 3남인 하우명이 남지에게 의뢰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 뒤 1995년에 이가원(李家源)교수에게 신도비명을 의뢰 새로 신도비를 세웠다.
묘역 주변에는 하우명(河友明, 1413~1493 동지중추부사, 효자)과 손 하철석(河哲石, 1432~1500 용양위 호군)의 묘와 선생의 2남 제명(悌明, 1407~1457, 예조좌랑)과 손 하중호(河仲浩, 1425~? 판관)의 설단이 있다. 묘 아래에는 선생의 재사(齋舍)인 소산재(蘇山齋, 또는 소산서원)가 있다. 재실은 세조 1년(1455)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963년에 세웠고, 다시 1995년에 건립하면서 소산서원(蘇山書院)으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