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시흥]강희안선생 묘 및 신도비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22. 10:00
강희안선생 묘 및 신도비
강희맹선생 묘역 한쪽 귀퉁이에 강희안선생 묘가 있다. 묘 자리로는 좀 이상하다 싶어 살펴봤더니 원래있던
비무장지대에서 최근에 이장한 묘였다. 주위에는 안내문도 없고 인터넷에도 별로 알려져 있지않아 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묘비문을 읽어보고 얻은 자료다.
묘자리는 별것 없어서 그냥 선생의 묘만 안내한다. 이장을 할 때 오히려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지만 자리가
없다보니 이렇듯 터만 있으면 옮겨놓고 보는 격이다. 어찌하여 처음부터 비무장지대에 모셔가지고... 운명이겠지...
강희안(姜希顔)
1441년(세종 23)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가 되었다.
1444년 2월 16일에 세종의 명에 의하여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최항(崔恒)·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과 함께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는데 참여하였다.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의 주석을 붙였다.
1446년에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1447년에 이조정랑이 되었고, 같은해에 집현전직제학 최항·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 등과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하였다.
1450년 왕이 위독하자 부지돈령(副知敦寧)의 직에 있으면서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經文)을 썼다.
1454년(단종 2)에 집현전직제학에 올랐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화를 면하였다. 후일에 다시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左司諫) 이종검(李宗儉)이 그의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462년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표·전(表箋)을 받들고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1464년에 사망하였는데, 세조가 관곽(棺槨)을 부의(賻儀)로 내려주었다. 그는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으며, 특히 전서(篆書)·예서(隷書)와 팔분(八分)에도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시는 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이 있으나 자신의 글을 세상에 발표하기를 꺼려 전하는 문집이 없다. 그의 그림은 송나라의 유용(劉墉)·곽희(郭熙), 글씨는 진(晋)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元)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기록상에 전하는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으며 영모화(翎毛畵)·산수화·인물화에도 모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여인도(麗人圖)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보(奇寶)라 할 수 있다.
1454년(단종 2)에 산천형세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鄭陟), 지도에 밝은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수양대군이 8도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하였다.
1445년 명나라에서 보내온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여덟 자 옥새를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그를 추천하여 쓰게 하였다. 세조 때에 임신자(壬申字)를 녹여서 새로 글자를 주조할 때 그가 글씨를 썼으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다. 그는 글씨 쓰기를 꺼려 그의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성격은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한때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는데, 여기에는 꽃을 가꾸는 일을 그의 경륜(經綸)의 뜻에 비추어 서술하고 있다. 그의 그림으로는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와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강지돈령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와 윤공간공형묘비(尹恭簡公炯墓碑)가 남아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미지정 강희안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산2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367(재실앞 공원) 진주강씨 ★ 강희맹, 강희안 가계도
▼ 강희안선생 단... 아마도 묘를 이장하기 전에 세운 단으로 보인다.
▼ 강희안선생 약력...한갑수선생이 지은 것이다
▼ 강희안선생 신도비...
▼ 강희안선생 신도비...
▼ 강희안선생 묘역
▼ 강희안선생 묘 옆 모습...
▼ 강희안선생 묘...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금곡동에서 1987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 강희안선생 묘비...
▼ 강희안선생 묘 석물...
▼ 강희안선생 묘 문인석 옆모습...
▼ 강희안선생 묘갈... 한글체로 쉽게 읽을 수 있고 묘 이장경위도 자세히 나와있다..
▼ 강희안선생 묘 구 묘비.. 이장 전에 있던 묘비와 장명등...
▼ 강희안선생 구 묘비.. 묘비 내용을 봐서 상하 쌍분이었지만 이장하면서 본 부인 고성이씨와
두번째 부인 언양김씨의 삼위합장으로 묘를 만들었다.
'답사는 즐거워 > 묘지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기 시흥]하연선생 묘 (0) 2011.09.24 [경기 시흥]영의정을 3번이나 한 김치인선생 묘 (0) 2011.09.23 [경기 시흥]강희맹선생 묘 및 신도비 (0) 2011.09.21 [경기 시흥]광해군 국구 류자신선생 묘 및 신도비 (0) 2011.09.20 [경기 시흥]박동량선생 묘 (0) 2011.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