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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시흥]광해군 국구 류자신선생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20. 10:00

    류자신선생 묘 및 신도비

     

    시흥에는 유난히 왕의 국구 즉 장인으로 지낸 분의 묘가 많다. 류자신선생 묘는 사위인 광해군이 왕일때 

    조성되고 신도비도 광해군 때 조성되어 묘역이 잘 조성되었다고 보여진다. 인조반정으로 집안이 몰락

    했지만 지금은 다시 일어나 좋은 땅의 기운을 아직도 받고 있는듯 하다.

    류자신선생 묘는 시흥8대명당으로 소문난 옥녀국부형 명당이다. 옥녀국부형이란 옥녀음부형의 다른 

    말이다. 즉 옥녀가 앞쪽의 군자산을 바라보면서 국부를 드러내놓고 유혹하는 형태이다. 이런 형국에서는 

    옥녀가 너무 노골적으로 유혹하면 화류계여인이 되어 좋게 안본다. 따라서 앞쪽에 장막이 가려져서 

    은은하게 유혹을 해야한다.

    그동안은 앞쪽이 휑하니 뚫려있어 바람을 직접적으로 받고 군자산이 오히려 망칙해서 고개를 돌렸겠지만 

    최근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4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앞쪽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장막을 쳐주게 

    되어 드디어 이 묘자리는 오히려 힘을 얻은듯 보인다. 아파트 개발이 형국을 오히려 좋게하는 경우도 

    있으니 참으로 모를일이다.

     

    류자신(柳自新)

     

    1541년(중종 36)∼1612년(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지언(止彦).
    아버지는 공조판서 잠(潛)이며, 어머니는 증호조참판 정승렴(鄭承廉)의 딸이다. 광해군의 장인이며, 이담(李湛)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 태릉참봉을 거쳐 돈령부직장(敦寧府直長)·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평강현감·호조좌랑·김포현령 등을 역임하고, 1579년(선조 12) 형조정랑·김제군수를 거쳐 1585년 장악원첨정 겸 내승(掌樂院僉正兼內乘)이 되었다.
    1587년 셋째딸이 왕자군 부인이 되니 이가 후일 광해군의 비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특명으로 안악현감에 임명되어 역도들을 잡아 처리하고,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가(大駕)를 호종하고 평양에서 묘사주(廟社主)를 모시고 광해군을 따라 강원도방면으로 나갔다가 그해 겨울 성천으로 나왔는데 특명으로 동지돈령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뒤 성천부사·개성유수에 이어 한성부우윤으로 있을 때인 1598년 명군을 구타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그뒤 한성판윤·도총부도총관 등을 지냈으며,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 문양부원군(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이 겸공(謙恭)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에 근신하고 권문세가로 행세하는 일이 없었다.
    1610년(광해군 2)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조반정 때 관작과 봉호가 추탈되었으며, 아들 희분(希奮)·희발(希發)·희량(希亮) 등은 처형, 유배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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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연락처) 

       시흥시향토유적 4호
       류자신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산32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 696(영모재 옆집)
       문화류씨


     

     

     

     

     

     

     

     

     

     

    류자신(柳自新)선생 묘 및 신도비


    류자신(柳自新, 1541~1612)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지언(止彦),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명종 19년(1564)에 진사시에 오른 후 김포현령, 광주목사, 한성부 판윤,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고, 셋째 딸이 광해군 비(光海君妃)가 되자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묘역은 옥녀국부형(玉女局部形)으로 선생의 묘지문에 따르면 시흥지방의 팔명당(八明堂)에 속한다.

    묘의 배치는 특이하게도 류잠(柳潛 1509~1576 공조판서. 류자신의 부친)ㆍ류덕신(柳德新, 1548~1617 돈령부도정. 류잠의 둘째아들)ㆍ류희갱(柳希갱, 진사. 류자신의 큰 아들)ㆍ류자신의 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내에 배치되어 있는 석물들은 39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거의 마멸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어 훌륭한 문화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묘역에 비해 석물 배치에 큰 차이는 없으나 상석 옆 양쪽에 향로석 이외에 또 다른 받침돌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40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 비는 본래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있었던 것인데, 자손의 번성을 위하여 광복 직후에 당시 돈 8만원의 거금을 들여 이전하였다고 한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인데,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 있는 조각이다. 광해군 9년(1617)에 세워진 이 신도비의 비문은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류근(柳根)이 짓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상용(金尙容)이 전자하였으며, 글씨는 병조참의(兵曹參議) 오정(吳靖)이 썼다. 그리고 신도비의 규모는 2.07m×1.14m×35cm에 이른다.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져 있는 재실(영모재)은 고종 22년(1885)에 건립되었고 안채는 튼 ㅁ자형으로 고종 6년(1869) 건립되었는데, 시흥관내에 현존하는 가옥으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생각된다.

    <시흥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류자신선생 신도비에서 바라본 묘역

    ▼ 류자신선생 신도비 안내판

    ▼ 류자신선생  신도비각

    ▼ 류자신선생 신도비 귀부..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 류자신선생 신도비 이수

    ▼ 류자신선생 재실... 재실 뒤로 묘가 보인다...

    ▼ 류자신선생 묘 안내판...

    ▼ 류자신선생 묘

    ▼ 류자신선생 묘 전경..

    ▼ 류자신선생 묘비

    ▼ 류자신선생 묘 앞 석물

    ▼ 류자신선생 묘 장명등...

    ▼ 류자신선생 묘 백호쪽 문인석... 400년이 되었는데도 깨끗하다..

    ▼ 류자신선생 묘 청룡쪽 문인석

    ▼ 류자신선생 묘 망주석

    ▼ 류자신선생 묘 후경...

    ▼ 류자신선생 묘역...

    ▼ 류자신선생 묘(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모습)... 이 묘역은 옥녀국부형으로 알려진 명당이다.

    옥녀국부형이란 옥녀음부형의 다른 말로 옥녀가 앞에보이는 군자봉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국부를

    드러내는 형국인데 이 사진처럼 앞에 아무것도 가리는 것이 없으면 혈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의 형국이 오히려 은은하고 신비스럽게 되어 앞쪽의 군자산이 요동을

    칠 태세다. 오히려 지금이 발복을 기대해도 좋을듯하다.

    ▼ 류자신선생 묘 위성사진... 앞쪽 군자산에서 볼때 여자의 음부로 보이나요? 형국은 이렇게 쉽게

    풍수를 설명할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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