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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흥]박동량선생 묘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19. 10:00
박동량선생 묘 및 신도비
군자산의 동편에 강한 기가 뭉친 곳에 박동량선생 묘가 있다. 선생의 묘 주산인 군자산은 아주 멋드러진 탐랑봉을
그 아래에 있는 묘소와 마을에 기운을 넣어준다. 이 산을 주산이나 조산으로 삼는 묘소의 후손이나 마을의 터를 받고 나온
사람중에 큰 인물이 있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앞서도 지적했지만 군자산 정상부위가 깨져있다는 것이다.
빨리 치료를 해서 좋은 氣를 전해주는 군자산이 되길 기대한다.
박동량(朴東亮)선생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되어 검열, 호조·병조의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하였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해 동부승지·좌승지를 거쳐 다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
1596년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살폈다. 이어 연안부사·경기도관찰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면서도 전란 뒤의 민생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하고,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일찍이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유영경(柳永慶)·서성(徐渻)·신흠(申欽)·허성(許筬)·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교7신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1612년 김직재무옥사건(金直哉誣獄事件)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 있던 그가 무고임을 알고 연루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뒤 자주 탄핵을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곧 풀려나와 복관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 때 모반혐의로 심문을 받다가 혐의가 희박하여 극형은 받지 않았는데, 이때 반역관계는 극구부인하면서 선조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 懿仁王后의 능)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 충원으로 옮겨지고, 1632년(인조 10) 전리에 방귀되었다.
뒤에 아들 미(瀰)와 의(漪)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상용(金尙容)·상헌(尙憲) 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기재사초》·《기재잡기 寄齋雜記》·《방일유고(放逸遺稿)》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시흥시향토유적 12호 박동량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22-2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54-6(주유소길),군자동 83-1(신도비) 반남박씨
박동량(朴東亮)선생 묘 및 신도비
박동량(朴東亮, 1569~1635)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룡(子龍), 호는 오창(梧窓)ㆍ기재(奇齋)ㆍ봉주(鳳洲),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선조 23년(15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기재사초(奇齋史草)』ㆍ『기재잡기(奇齋雜記)』ㆍ『방일유고(放逸遺稿)』 등이 있고, 그림으로 「계산초정도(溪山草亭圖)」가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는 군자봉 동쪽 능선상에 자리잡았으며, 묘 아래에는 아들 박미(朴彌, 금양위)의 묘가 있다. 묘역의 석물 배치는 봉분 앞에 상석ㆍ향로석 등과 그 좌우에 묘비ㆍ망주석 등이 있다. 신도비는 묘소에서 동북쪽으로 약 250m 지점에 아들(박미)의 신도비와 함께 서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인조 19년(1641)에 찬술(撰述)하였으나, 상사(喪事)가 잇달아서 돌에 새겨 세우지 못하다가 영조 1년(1725)에 이르러 그의 5대손인 박사익(朴師益)이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신도비는 2단의 기단석 위에 석신(石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를 올려놓았는데, 첫 번째 기단석은 땅속에 묻혀 크기를 알 수가 없고, 두 번째 기단석은 높이 1.79m, 폭 1.23m이며, 비신은 높이 2.45m, 폭 1.13m, 두께 36cm의 규모인데, 석질은 오석(烏石)에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비문의 글씨는 중추부사(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썼고, 형조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전자(篆字)하였다. 그리고 신도비의 추기(追記)는 그의 현손 전 장령(前掌令) 박필주(朴弼周)가 기록하고, 글씨는 5세손 강화유수 박사익이 썼다. 1993년 10월 24일에 신도비각과 사적비(글: 단국대 박천규 교수)가 반남박씨 오창공파종중에 의해 건립되었다. 한편 박미의 신도비의 비신은 높이 2.1m, 폭 1m 이내, 두께 49cm이며,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비문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이조판서 이의현(李宜顯)이 썼으며,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전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