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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시흥]세종8남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16. 10:00

    세종8남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영응대군 묘를 찾아가는 길에 산이 하나 보이는데 아주 멋진 탐랑봉(삼각형 형태의 산)이 보인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평지에 우뚝솟아 이 일대에서는 제일 높아보인다. 첫 느낌에 이 일대에 많은 묘가 있을거로 

    예측된다. 어떤 묘는 이 산 아래에 있을거고 어떤 묘는 이 산을 바라보며 있을 것이다.

    팔당의 예봉산, 남양주의 천마산, 양평의 주엽산 등이 그 일대의 묘들의 기준 산이 된 것처럼....

    조금 뒤에 확인해보니 그 산이 군자산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 이름을 지어도 풍수에 입각해서 참 잘도 짓는다. 아쉽게도 산 정상을 누가 훼손했는지 

    뾰족봉이 없어지고 밋밋하게 되어 탐랑봉이 녹존봉으로 변해있었다. 

    군자를 낳는다는 산이 군수봉으로 변했으니... 시흥시만의 안타까움일까...?

    시흥시의 인재배출을 원한다면 군자산의 정상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년(세종 16)∼1467년(세조 13). 조선 전기의 종실. 자는 명지(明之)이고, 호는 서곡(西谷). 이름은 이염(李琰).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세종의 여덟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41년(세종 23)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지고, 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에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처음에 해주정씨(海州鄭氏)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딸과 결혼하였고, 후취로 여산송씨(礪山宋氏) 판중추(判中樞)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맞아들였고, 다시 연안김씨를 맞아들였다.
    부왕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1450년 부왕 세종의 죽음도 그의 저택인 동별궁(東別宮)에서 였다.
    1463년(세조 9)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통달하였다.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시흥시향토유적 9호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70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659-1(재실)
       전주이씨


     

     

     

     

     

     

     

     

     

     

    영응대군(永膺大君) 묘 및 신도비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은 조선시대의 왕자로 자는 명지(明之), 호는 서곡(西谷), 이름은 염(琰)이다. 세종의 8남으로 세종 23년(1441)에 영흥대군(永興大君), 세종 25년(1443)에 역양대군(歷陽大君), 세종 29년(1447)에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특히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를 번역하였고, 서화(書畵)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세조 12년(1467) 2월 2일에 서울 견지방(堅志坊) 자택에서 사망하여 이해 3월 19일에 양주(楊州) 군장리(郡場里)에 예장을 치른 후, 연산군 4년(1498)에 신도비를 세웠다.

    그 뒤 광무 4년(1900) 9월 17일에 대군의 첫 부인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해주 정씨(海州鄭氏)와 둘째 부인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묘를 현 위치로 천장한 후 1968년에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셋째부인 연안부 부인(延安府夫人) 연안 김씨(延安金氏) 및 아들 청풍군(靑風君)과 손 화림정(花林正), 그리고 증손 흥선부정(興善副正), 흥정부수(興貞副守)의 묘를 옮겨 봉안하였다.

    묘는 대군과 해주 정씨 및 여산 송씨와 합장이고 그 왼쪽에 연안 김씨의 묘가 자리잡았고, 두 묘 가운데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그리고 그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연산군 4년(1498)에 세운 것으로 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m 떨어져 있는데, 기단석 대신에 귀부 위에다 비신을 세웠고, 다시 그 위에 옥개석 대신에 이수를 얹어 놓았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1.45m, 폭 84cm, 두께 21cm이고, 비면에는 『永膺大君 神道碑(영응대군 신도비)』란 전제(篆題)와 『有明朝鮮國 永膺大君諡敬孝公神道碑銘(유명조선국 영응대군시경호공신도비명)』이란 비제(碑題)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아울러 전액(篆額)했으며, 글씨는 기위부사정 박경(朴耕)이 썼다. 1992년에 신도비의 보호철책을 세웠다. 묘 입구에는 대군의 시호명을 취한 재실(경효재, 1969년경 건립)과 사당(경효사, 1997년 건립)이 각각 위치해 있다.

    <시흥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영응대군 묘역.. 왼편으로 묘가 보이고 우측에 신도비가 있다.

    ▼ 영응대군 재실 경효재 삼문..

    ▼ 영응대군 재실 경효재

    ▼ 영응대군 묘역 안내판...

    ▼ 영응대군 신 신도비...

    ▼ 영응대군 사당...

    ▼ 영응대군 묘역

    ▼ 영응대군 구 신도비각

    ▼ 영응대군 구 신도비

    ▼ 영응대군 신도비 귀부는 아주 익살스럽게 생겼다..

    ▼ 영응대군 신도비 귀부 뒷모습... 익살스럽다해야하는지 유치하다 해야하는지...

    ▼ 영응대군 묘역

    ▼ 영응대군 묘역 전경

    ▼ 영응대군 묘... 앞에서 봐서 왼쪽 묘에는 영응대군과 해주정씨,여산송씨의 합장묘, 우측 묘는

    봉천동에서 이장해온 연안김씨 묘...

    ▼ 영응대군 묘비

    ▼ 장명등

    ▼ 영응대군 묘 좌우 문인석

    ▼ 영응대군 묘 측경...

    ▼ 영응대군 묘 입수처..

    ▼ 영응대군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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