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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흥]윤민헌선생 묘 및 신도비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14. 10:00
윤민헌선생 묘 및 신도비
윤민헌 선생은 이번 답사전에는 잘 몰랐던 인물이다. 그런데 풍수에서는 복호혈로 이미
많이 알려지신 분이다. 물형론은 보는 사람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데 이곳 복호혈은 문외한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의 대표적 사례다.
윤섭, 정숙옹주(성종의 녀) 묘역에서 윤민헌 선생 묘역을 바라보면 엎드린 호랑이 형태가 자세히 보인다.
복호혈에는 개나 사슴 등을 닮은 안(案)이나 사격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시길...
이런게 없다면 후손들이 호환을 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윤민헌(尹民獻)
1562년(명종 17)∼1628년(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아버지는 호조좌랑 엄(儼)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주(金澍)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전적이 된 뒤 형조좌랑을 거쳐, 1612년 전라도도사로 전임되었다.이듬해 형조정랑으로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고,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자 외직을 자청하여 괴산군수로 나갔다가 곧 파직되었다.1617년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재기용되어 그해 가을 사성에 올랐으나, 부당한 인사라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1618년 대동찰방(大同察訪)이 되었으나 얼마 뒤 파직당하였으며, 이때부터 안산(安山) 선묘하에 퇴거하였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군자감정에 임명되고, 장령·내섬시정(內贍寺正)을 거쳐 평안도절도사로 나갔다.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안산으로 돌아와 죽었다.그는 자성(資性)이 순정(純正)하고, 일을 당하여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에 능하였다.특히, 조맹부(趙孟頫)를 사숙(私淑)하여 해서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시흥시향토유적 16호 윤민헌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산53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370-3(재실) 파평윤씨
윤민헌(尹民獻)선생 묘 및 신도비
"윤민헌(尹民獻, 1562∼1628)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엄(儼)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주 김주(金澍)의 딸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다.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외교문서 담당 관청)에 들어갔다. 그 뒤 형조좌랑·전라도도사·형조정랑 등을 거쳤으며, 광해군때 붕당간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지럽자 1618년 대동찰방을 마지막으로 안산(현재의 시흥)으로 물러나 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군자감정에 임명되고, 장령·내섬시정을 거쳐 평안도절도사로 나갔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정3품)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안산으로 돌아와 타계하였다. 1646년(인조 24)에 대제학,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는 자성이 순정하고, 일을 당하여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사에 밝고 시문에 능하였다고 한다. 특히, 조맹부를 사숙하여 해서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이 묘소는 부인 연안 김씨와 합장으로, 묘는 인조 6년(1628)에 조성되었는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혈(伏虎穴)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묘갈은 숙종 35년(1709)에 세운 것으로, 형태는 당시 유행하던 방부개석의 양식인데, 기단석 위에 갈색의 대리석 비신(碑身 234cm×97cm×32cm)으로 다듬었다. 글씨는 선생의 손자인 평안도 관찰사 윤지인(1656~1718)이 썼고, 함흥부윤 윤덕준(1658~1717)이 전(篆)을 올려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 음각하였다. 이 묘갈은 시흥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가 좋고 양식이 독특하여 조선 중기의 묘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