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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시흥]애국지사 조병세선생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9. 10:00

    애국지사 조병세선생

     

    장유선생 묘역에서 조병세선생 묘역까지는 직선거리로 얼마 되지 않은데 그곳으로 서해안고속도로 

    조남인터체인지가 지나는 바람에 빙 둘러가야 된다. 이곳의 산세는 대체로 수려하고 모양이 좋은데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로 인해 교통의 요지가 되다보니 기맥이 단절되고 장풍이 누설되는 곳이 

    곳곳에 보인다.

    조병세선생 묘는 북향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후손들에 의해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어 

    있었다. 현장에는 선생의 사적비와 와비가 그대로 있다. 아마도 조만간 향토유적에서 해제될 것으로 

    보인다. 


    조병세(趙秉世) 

     

    1827년(순조 27)∼1905년. 한말의 문신·순국열사.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현감 유순(有淳)의 아들이다.
    노론파의 명문에서 태어나 음관(蔭官)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1864년(고종 1) 실록청도청낭청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이조의 판서, 1889년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그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중되어 세상이 어수선하게 되자 정계를 떠나 가평에 은퇴하였다. 뒤에 다시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을 역임하고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으나, 주로 가평에 은퇴하고 있었다.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하여 시무(時務)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경,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고, 13도유생들이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상소하는 중에 19일에는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한 조관(朝官) 30여명이 개별 상소하여 5적의 처형과 조약폐기를 요청하였으나 국왕의 확고한 대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26일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이근명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 입궐하여 정청(庭請)의 소두(疏頭)로서 을사조약의 무효, 5적신의 처형, 새로 충량한 인재를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방면되었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또다시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연행당한 뒤 민영환이 대신 소두가 되었으나 민영환도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하여 29일 자결하였다.
    강제연행된 뒤 곧 가평 향제에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상경하였다. 표훈원에 되돌아와 유소(遺疏)와 일본공사 및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상소하였는데,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 조카 민희(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시흥시향토유적 5호
       조병세선생 묘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21-7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502-1(민가쪽에 표지판 보임)
       *2011.5.12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됨


     

     

     

     

     

     

     

     

     

     

    조병세(趙秉世)선생 묘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열사로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철종 10년(1859)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사헌, 예조판서, 좌의정, 중추원 좌의장 등을 역임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무효화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저서에 『조병세씨 일기(趙秉世氏日記)』가 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묘역은 마하산 동쪽에 있는데, 선생의 묘는 위에서 세 번째이다. 선생의 묘 앞에 있던 아들 조중목(趙重穆 1869~? 경기도 관찰사)의 묘는 1990년에 이장되었다. 묘 앞에는 상석ㆍ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망주석이 있다. 봉분의 높이는 1.4m에 지름은 5.5m에 이른다.

    1990년 12월 1일에 선생의 사적비(事蹟碑)와 와비(臥碑)가 세워졌는데, 사적비는 묘 오른쪽에, 와비는 그 왼쪽에 각각 배치되어 있다. 사적비의 비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이 짓고,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썼으며, 와비는 선생이 남긴 유소(遺疏), 국민에게 고하는 유촉(告國民遺囑),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致各國公使)이다.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다음의 글은 선생이 순국하기 전 남긴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의 내용이다.

    병세(秉世)가 전일 일사(日使)의 늑약(勒約)한 일로 각 공사관 여러 각하에게 알리었는데 끝내 한번 회합 담판을 하지비못하게 되니, 분심이 가슴을 버리어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웃나라의 우의를 멀리 생각하고 약소국가를 동정하시어 공동회의로 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병세는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습니다. 정신이 어지럽고 숨이 차서 무어라 말을 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흥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조병세선생 묘역... 윗쪽은 선조들 묘.. 좌측에 와비, 우측에 사적비가 함께 있다.

    ▼ 조병세선생 묘역 입구...

    ▼ 조병세선생 묘 안내판...

    ▼ 조병세선생 묘역 전경..

    ▼ 조병세선생 묘가 있던 자리...

    ▼ 조병세선생 묘는 이장하고...

    ▼ 조병세선생 묘는 2011.5.12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고 현장에는 표석만 있다.

    ▼ 조병세선생 묘 사적비 전면.. 여초 김응현 선생 글씨다..

    ▼ 조병세선생 묘 사적비 후면...

    ▼ 조병세선생 묘 사적비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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