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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흥]효종의 국구(國舅,장인) 장유선생 묘 및 신도비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8. 10:00
효종의 국구(國舅,장인) 장유선생 묘 및 신도비
시흥시에 산재해 있는 묘소를 가려고 몇번 시도를 했었는데 잘 안되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번에 시흥시 묘지 완전정복을 기획했다. 묘지답사팀과 함께했다.
이동동선에 맞춰 제일 먼저 서울에서 접근하기 쉬운 장유선생 묘를 먼저 찾았다.
목감나들목에서 나와 조금 가면 새롭게 공공건물(아마도 교도소인듯)이 들어선
곳으로 꺾어 들어가면 바로 묘역 윗쪽으로 진입한다.
장유(張維)
1587년(선조 20)∼1638년(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아버지는 판서 운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수봉, 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되자 불가함을 주장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풍토에 대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고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 “고 하였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한다.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시흥시향토유적 2호 장유선생 묘 및 신도비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5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10-1(묘역 윗쪽으로 진입) 덕수장씨
장유(張維)선생 묘 및 신도비
장유(張維, 1587~1638)선생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문장가로,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所)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광해군 원년(160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주서, 대제학, 나주목사, 예조ㆍ이조판서ㆍ우의정 등을 역임하고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술(醫術), 병서(兵書) 등 각종 학문에 두루 능통하였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 등이 전해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그 앞에 혼유석ㆍ상석ㆍ향로석이 놓여 있고 좌우에 문신석인 두 쌍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져 있다. 신도비는 2.5m×4.2m, 높이 1.3m 규모의 귀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비신의 규모는 높이 2.65m, 폭 1.3m, 두께 32cm이며, 비개(碑蓋)는 옥개(屋蓋) 위에 용(龍)이 조각되어 있다. 이 신도비는 현존 우리 나라의 신도비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묘소에는 현종 어제(御題)의 표액(表額)과 그의 아들 선징의 음기(陰記)로 된 표석 및 정두경(鄭斗卿)이 찬(撰)한 지석이 있다.
선생의 사망 39년 만인 숙종 2년(1676) 10월에 세운 이 신도비의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가 썼다. 묘역 주변에는 선생의 부친 장운익(張雲翼, 1561~1599 이조판서) 신도비를 비롯하여 아들 장선징(1614~1678 예조판서), 손 장훤(천안군수), 증손 장진환(張震煥, 1646~1722 예산현감) 등의 묘가 있다.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부친(장유)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법연사지가 있고, 현재의 법연사는 1989년에 건립하였는데 묘역에서 북쪽으로 약 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법연사 아래에는 선생의 종택(宗宅, 조남동 2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