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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시흥]영의정을 3번이나 한 김치인선생 묘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9. 23. 10:00

    영의정을 3번이나 한 김치인선생 묘

     

    김치인선생 묘를 찾아가는 길은 좀 복잡하였다. 안내판을 따라 잘 찾아갔어도 현지에서 묘역 안으로 

    들어가기란 무척 힘들었다. 가을철에는 빈 밭으로 통해서 들어가면 되지만 여름철에는 밭에 잡초가 

    우거져있어 풀을 헤쳐가며 전진을 해야하는 상황이라 많이 힘들었다.

    이번 시흥답사를 하는 중에 김준용장군 묘는 표지판이 잘못되어 끝내 찾지 못했고, 조병세선생 묘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전 하였는데도 제대로 표기를 하지 않았고, 여기 김치인선생 묘는 입구가 없어 

    애를 먹었다. 이런 내용을 이번 답사를 끝내고 시흥시청에 건의하였더니 대부분 시정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김치인(金致仁)

     

    1716년(숙종 42)∼1790년(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우의정 구(構)의 손자이고, 영의정 재로(在魯)의 아들이다.

    1747년(영조 23)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하여 예문관전적과 사간원정언을 거쳐 문경어사(聞慶御史)로 문경현감의 탐욕을 복명하였다. 이어 지평과 문학을 거쳐 1750년에는 호남어사로 활약하였다. 1752년 승지에 오르고, 이어 대사간·비변사부제조(備邊司副提調)·대사성·부제학·이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지냈다. 1762년 이후 이조·호조·형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765년 우의정에 올라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그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영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을 지냈다.

    1772년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로 직산현(稷山縣)으로 유배되었으나, 반년 만에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다시 서용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어 고부 겸 승습주청사(告訃兼承襲奏請使)의 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다시 영부사(領府事)를 거쳐 봉조하가 되어 《명의록 明義錄》 편찬을 주관하고, 1785년에는 《대전통편》 편찬을 주관했다. 이듬해 영의정으로 기용되어 정조의 명으로 당쟁의 조정에 힘썼다.

    성품이 치밀하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로, 나라의 전고(典故)에 정통하여 이를 정사에 활용하는 데 능하였다.

    편저로 《명의록》·《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가 있다. 시호는 헌숙(憲肅)이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시흥시향토유적 1호

    문화재명칭

    김치인선생 묘

    소재지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 360-6(주차장:안현동 364-8)

    관리자(연락처)

    청풍김씨


    김치인(金致仁)선생 묘

     

    김치인(金致仁, 1715~1790)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영조 24년(1748)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교리, 병조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고, 편저로 『명의록(明義錄)』과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가 있다. 시호는 헌숙(憲肅)이다.

    묘는 안현동 길마재마을에 있는데,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 이씨(完山李氏)ㆍ달성 서씨(達城徐氏)ㆍ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세 부인과의 합장이다. 첫 부인 완산 이씨는 묘 오른쪽에, 둘째 부인 달성 서씨와 광주 이씨는 그의 묘 왼쪽에 각각 합장되었다.

    묘역은 호석(護石)을 두른 봉분을 중심으로 왼쪽에 묘갈이 있고, 한 단 중앙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자리잡고 좌우에 망주석과 석양(石羊) 한 쌍이 서 있다. 묘 왼쪽에 있는 묘갈은 정조 14년(1790) 5월 20일에 세운 것으로 비신은 높이가 1.61m, 폭 68cm, 두께 37cm이며 비문은 조돈(趙暾, 1716~1790 이조판서)이 짓고 아울러 글씨를 썼으며, 전면 글씨는 그의 형 김치일(金致一, 장락원 정)의 아들 김종순(金鍾純, 1750~1802 부정자)이 썼다. 또 지문(誌文)은 종형(從兄) 김치만(金致萬)의 아들 김종수(金鍾秀, 1728~1799 좌의정)가 썼다.

    신도비는 묘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묘역 내에 있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문신석인석(文臣石人石), 장명등(長明燈), 하마비(下馬碑)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반출해 갔다고 전해진다. 재실(99칸 규모)과 연못은 가문의 쇠퇴에 따른 관리 소홀로 그 흔적조차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시흥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청풍김씨 가계도

    13세
    김인백
      14세
    김극형
      15세
    김징
    (관찰사)
      16세
    김유
    (대제학)
      17세
    김상로
    (좌의정)
    김약로
    (영의정)
     
      16세
    김구
    (우의정)
      17세
    김재로
    (영의정)
      18세
    김치인
    (영의정)

     

    ☞ 조부 충헌공 김구 선생 묘 바로가기

     

    ▼ 김치인선생 묘... 묘가 민가에 둘러쌓여 있다. 

    ▼ 김치인선생 묘 찾아가는 길... 여름이라 풀이 우거져서 들어가기 힘들었다.

    ▼ 김치인선생 묘 안내판

    ▼ 김치인선생 묘 전경...

    ▼ 김치인선생 묘역 석물..

    ▼ 김치인선생 묘비... 완산이씨는 우측, 달성서씨는 좌측, 광주이씨는 선생 묘 앞에 있다..

    시흥시의 내용을 수정해야 할듯...

    ▼ 김치인선생 묘갈...

    ▼ 김치인선생 묘 석물... 묘를 민가의 담장들이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 김치인선생 묘 후경... 넓은 명당이 시원하다.. 묘역으로 들어오는 맥이 손상을 입어서인지

    후손들이 몰락해서인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않아 묘역이 형편없이 되었다. 일제시대에 묘 석물들이

    반출되고 신도비도 없어지고 재실도 없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인것은 근자에 문화재로 지정되어

    더이상의 훼손은 없을듯... 이 또한 앞쪽의 넓은 명당이 200년 뒤의 발복을 받는 것일까?

    ▼ 김치인선생 셋째부인 정경부인 광주이씨 묘 후경... 조산으로 소래산이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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