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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광주]계림군(鷄林君) 김균선생묘(金稛先生墓)
    답사는 즐거워/묘지답사 2011. 10. 6. 10:00

    계림군(鷄林君) 김균선생 묘 

     

    김균선생 묘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곳에 도착해서 안보이면 찾기 어렵다. 지도를 일일이 

    복사해서 다닐수도 없고... 이럴때 요긴하게 쓰이는게 요즘 왠만한 사람들은 다 가지고 다니는 아이폰이다. 

    아이폰으로 위성사진을 훑어보면 금새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도 그 주위에서 묘를 못찾을 때 활용하는 

    방법이지 엉뚱한 곳에서는 찾기 힘들다.

    김균선생 묘는 인근의 교회건물을 기점으로 생각하고 찾으려 했는데 막상 길을 잃어버려 못찾다가 교회

    관계자분께서 자세히 알려주셔서 찾게 되었다. 문명의 이기가 없을 때는 먼저 산을 한번 둘러보고 찾게

    되는데 요즘은 네비게이션과 아이폰이 있다보니 그걸 먼저보게된다. 그러다보니 바로 옆 산에 뻔이 

    보이는데도 그걸 못찾고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혼자 답사하지말고 뭉쳐서 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균(金稛)
    미상∼1398년(태조 7).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공역승(供驛丞) 남미(南美)의 현손, 예빈경(禮賓卿) 수(粹)의 증손, 예의판서(禮儀判書) 기연(起淵)의 손자, 아버지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使) 지윤(智允)이다. 장인은 개국원종공신 밀직부사 권현(權鉉)으로 고려관직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이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공양왕대에는 조준(趙浚)이 권력을 잡자 친우인 인연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를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가자되고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공신호를 받았으며,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보국숭록좌찬성(輔國崇祿左贊成)에 이르렀다. 가족 중에 태조의 공신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아우 은(穩), 당숙 의(義) 등이 개국원종공신이었고, 자녀의 통혼가문이 태조에게 각별히 우대된 노은(盧訔)·문계종(文繼宗)·이정간(李貞幹) 등의 공신가에서 딸을 맞았으며, 사위는 신간(辛僩)과 태조의 지우(知友)이자 고려 입절인(立節人)인 차원부(車原頫)로, 조선 건국과정에서 중진급 정치집단을 이루었던 세력이었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문화재명칭 
     소재지 
     네비게이션주소 
     관리자(연락처) 

       경기도기념물 제105호
       김균선생묘(金稛先生墓)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산89-1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586(경비실앞)
       경주김씨


     

     

     

     

     

     

     

     

     

     

    김균(?∼1398) 선생의 묘

    조선의 개국공신인 김균(?∼1398) 선생의 묘이다. 고려 공민왕 9년(1360) 성균시에 합격하였으며 공양왕 때에 전법판서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를 추대한 공로로 개국공신 3등 15명 중 제2인으로 정해져서 중추원 부사로 승진되고 익대개국공신이라는 공신이름을 받았으며, 계림군에 봉해졌다. 벼슬은 보국숭록좌찬성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제숙의 시호가 내려졌다.
    가족 중에 태조의 공신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진급 정치집단을 이루었다. 묘역은 담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묘 앞에는 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문인석 2쌍,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상석의 왼쪽에 묘비가 있으며, 묘역 앞쪽 약 80m 지점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병선이 짓고 윤용구가 글을 써서 1905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현재 묘역의 건립 시기는 18세기 후반으로 보이며, 묘비는 그 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김균(?∼1398)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곡담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은 앞부분에 장대석으로 호석(護石)을 쌓아 놓았다. 봉분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을 위치한다. 상석과 장명 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문인석 2쌍,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석물 중 상석·향로석·장명등은 근래에 새로이 설치한 것이다. 상석의 좌측에는 묘비가 있으며, 묘역의 전방 약 80m 지점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위치하고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송병선(宋秉璿)이 찬(撰)하고 윤용구(尹用求)가 글을 쓰고 김영한(金寧漢)이 전액(篆額)을 써서 1905년에 건립한 것이다. 이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의 묘역이 실전(失傳)되었다가 이 묘역이 있던 고을 유수(留守)로 온 후손 김사목(金思穆)이 수소문하여 찾았다고 기록되어, 현재 묘역의 건립시기는 18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묘비 역시 그 후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김균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9년(1360)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고 공양왕(恭讓王) 때의 관직은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의 개국 때에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3등 15명 중 제 2인으로 책훈되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승진되고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공신호를 받았으며 계림군(계林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보국숭록좌찬성(輔國崇祿左贊成)에 이르렀다. 가족 중에 태조(太祖)의 공신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진급 정치 집단을 이루었다.

    <광주시 문화관광 사이트에서 인용>


     

     

     

     

     

     

     

     

     

     

     

     

     

     

     

     

     

     

     

     

     

     

     

     

     

     

     






















    ▼ 김균선생 묘 전경

    ▼ 김균선생 묘 입구 경비실..

    ▼ 김균선생 묘소 입간판.. 잘 보이지 않는다..

    ▼ 김균선생 묘 안내판...

    ▼ 김균선생 묘

    ▼ 김균선생 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 김균선생 묘

    ▼ 김균선생 묘비

    ▼ 김균선생 묘비 뒷면...

    ▼ 김균선생 묘 석물...

    ▼ 김균선생 묘 석물..청룡쪽

    ▼ 김균선생 묘 입수처..

    ▼ 김균선생 묘 후경... 묘역이 경사가 졌다..

    ▼ 김균선생 묘역 앞에 조성된 전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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